몇 년 전 한 젊은이가 베이 소어에 있는 우리 수도원으로 찿아왔다. 내가 문을 열자 그 젊은이는 내게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그러세요,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성서에 관심을 갖는지 물어 보았고 나는 성서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성서를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19세 정도의 이 젊은이에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제들이 있는 수도원으로 찾아와서 가톨릭 사제들을 회개시키려고 한 그 대단한 용기와 열정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어떤 확신을 가졌었고 거기에 나는 탄복했다. 잠시동안이지만 나는 깊이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 젊은이를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다면 그 젊은이가 우리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퍼뜨리는 일에서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고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무언가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 젊은이와 대화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본 것은 4피트 높이의 크고 아름다운 은총의 중개자이신 성모마리아상이었다. 마침 그가 서 있는 앞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왜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기도하는가를 물었다. 성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으며 예수님도 자기 어머니에게 가서 기도하거나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성서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의아스러워하며 성서를 건네 주었다. 나는 루가복음 2장을 펼쳤다. 그곳은 3일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는 장면이 있는 곳이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나는 젊은이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와 양부인 요셉에게 순종하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 젊은이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치 어린이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제 4계명을 배운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 어머니를 공경하였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자 함인가요?” 라고 다시 묻자 그는 “예”하고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성서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매우 고마워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보다 더 훌륭히 행동했어요. 당신의 성경이 옳습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모범을 보이니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도 행하라.’ (요한 13,14-15 참조)”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30년 동안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모범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33년 중에서 30년 동안 주님께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 예수님은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 (루가 2, 51)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리아를 공경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니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톨릭에 대해서 잘못 말하면서 돌아 다니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범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마리아를 사랑하고 마리아를 따라 순종하며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에게 기도하며 마리아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생애 중에서 30년 동안 자신을 한 피조물인 마리아에게 순명한 것이 당신의 품위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한다.
주님께서는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행하셨다.
첫째 이유는 당신 아버지께 영광 드리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것이다.
성서에 이런 뜻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당신은 깨달았는가?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천주 성부께 영광을 돌리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가지고 계셨던 무한한 ‘지혜’는 그 대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완전하고 빠른 방법으로서 세상의 아이들처럼 겨우 여덟 살, 열 살 혹은 열 다섯 살까지만이 아니라,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완전히 순종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설교하시고 모든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 삼십년을 보내셨다면 당신이 하신 모든 일로써 하느님께 영광드린 것보다 성모님께 순종하고 의탁했던 그 모든 세월동안 천주 성부께 드린 영광이 더욱 큰 것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완전한 봉헌 1, 139항)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성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으신 것도 성부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다.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은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우리도 주 예수의 표양을 본받아 마리아에게 순종한다면 하느님께 얼마나 큰 영광이 될까? 이렇게 우리에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예수께서 친히 30년 동안 실천하여 (자신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 보여주신 그 표양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다른 데에서 예수의 영광을 위해 더 완전하고 빠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 말씀은 놀라운 것이다. 이 짧은 문장을 더 깊이 묵상하고 반성해보면 더욱 그리스도의 위대한 표양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던 그 불쌍한 젊은이는 나의 설명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결국 그는 돌아가기 전에 “파수대”라는 책을 주고 싶어 했으나 나는 받지 않았고, 성모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그 젊은이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내가 그를 성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갖가지 제의와 성작, 상본 등을 설명하자, 그의 눈은 그의 머리 속으로부터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그 젊은이는 어떤것도 그 전처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이 젊은이는 “여호와의 증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유럽을 떠나 자기 길을 갔다. 나는 ‘가톨릭 신자들이 이 젊은이의 진리에 대한 열망을 반만큼이라도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젊은이는 회개하도록 자신을 이곳에 밀어 보낸 분(마리아)에게 용기와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전체 진리를 듣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가 자기 손에 들고 있던 책, 바로 그 성서가 가톨릭의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에 대한 계시였다.
수십 세기 동안 가톨릭이 지켜온 것이기 때문에 그의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 남양성모성지 “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 (월간소식지)
– ’04. 8. 제160호 ‘성모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