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하고 죄 많은 영혼이라도 내게 오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라.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측량할 수 없는 내 무한한 자비에 잠길 수 있게 되리라.”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하신 말씀, 일기 1059)
1990년대 초, 철의 장막이 붕괴된 직후였다.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던 교회에 박해의 고삐를 늦추었다. 호전적인 무신론자들은 더 이상 신자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이제는 오히려 공산주의자인 정치인들이 교황이 새로 임명한 주교들과 화해하고 함께 협력하고자 애썼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깊은 나락에 떨어져 있던 그 당시, 하느님의 자비가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동부 슬로바키아에 있는 어느 도시에서 시장이 주교에게 의사 자격이 있는 사제를 청했다. 도시의 많은 매춘부들에게 매춘이 얼마나 건강에 위험한지에 대한 강연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교회에는 박해 시기에 비밀리에 서품을 받았던 몇몇 사제가 있었다. 그들은 의사로 일하면서 전혀 들키지 않고 사제로서 아주 훌륭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주교는 경험이 많고 마음이 너그러운 얀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얀 신부는 이 까다로운 임무가 결코 기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그런 곳의 그런 못된 사람들>을 상종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 써야 하다니!’ 하지만 그는 주교의 명령대로 정해진 시간에 시청의 문화센터로 갔다. 거기에는 시장의 명령에 따라 모인 문제 소녀들과 여인들이 있었다. 그가 먼저 가까운 성당에 들어가 성체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감동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주 이성적인 사제이며 의사였던 얀은 일생 동안 한번도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영혼 속에서 들은 적이 없었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성체 앞에서 우울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불평을 했다.
“나의 주님, 정말로 제가 ‘여기 이런 사람들’ 에게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때 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 오는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다.
“얀 요한, 왜 너는 ‘이 못된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 네가 그들을 위해 고통을 겪었느냐? 아니지 않느냐? 내가 그들을 위해 고통을 참아 냈고 그들을 위해 죽었다. 나는 그들 모두를 흰 백합으로 내 품에 끌어안는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해 주어라!”
자비로운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한 얀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여자들이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체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 잠깐 동안에 내적으로 완전히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연내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고심 끝에 그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가졌던 생각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말씀을 소녀들과 여자들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순결한 백합으로 내 품 안에 끌어안는다. 나는 그들을 위해 고통을 참아 냈고 그들을 위해 죽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흐느낌이 일어났다. 모두가 자신들의 삶을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신자였던 이들은 모두 고해성사를 청했다.
– 독일잡지 ‘Triumph des Herzens, 2003’ 에서
– 마리아 2003년 9~10월 12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