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은 예수님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가득 채웁니다.” 이 말씀으로 시작되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복음 선포’라는 주제를 전개하신다. 이 주제의 바탕에는, 다른 무엇보다 2012년 10월 7일부터 28일까지 바티칸에서 “그리스도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로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작업이 큰 기여를 하였다. 교황님께서 지난 주일 신앙의 해 폐막 미사 이후 36명의 신자들에게 건네주신 이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전임자이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함께 쓰신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공식 문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쓰셨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두드러진 복음화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도록 격려하면서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가게 될 여정을 위한 새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는 세례 받은 모든 이를 향한 교황님의 진심어린 호소로, 이들이 새로운 열정과 활력으로, 곧 “지속적인 선교 상태”로,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오늘날 세상의 커다란 위험, 곧 개인주의적 ‘피폐와 고통’에 빠지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자고” 초대하시며, “새로운 길”과 “창조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진부한 도식” 안에 가두지 말자고 하신다.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므로, “사목적이고 선교적인 회개”가 필요하고, 또 교회 조직들을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교회 조직의 “개혁”이 필요하다. 교황 성하께서는 교황 직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뜻과 현재의 복음화 요구에 더욱 충실하도록” “교황직의 전환”도 고려하고 계신다. 또한 각국 주교회의가 “합의체적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신다. “건실한 분권화”가 필요하다. 이 쇄신의 과정에서 교회는 “비록 오랜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핵심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부 관습을” 두려워 말고 재고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개방성을 보여 주는 표시로, “우리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차갑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성사들의 문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성찬례는 “완벽한 이들에게 마련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이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신중하고도 담대하게 숙고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 사목적 귀결로 이어진다.”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하신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걱정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걱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정을 맺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교황님께서는 “개인주의를 비롯하여 정체성의 위기와 열의 부족”처럼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교회의 일상생활에 스며든 음울한 실용주의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황님께서는 “패배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혁명”을 이루는 희망의 징표가 되라고 촉구하신다.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하고 나만 잘 살자는 “웰빙 정신”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의 세속성”을 이겨내야 한다. 교황님께서는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은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이들을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또한 “화려한 전례와 교리 또는 교회의 특권에 너무 집착하며,” “사람들의 요구에 복음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는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이다……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이나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교황님께서는 교회 공동체들이 시기와 질투의 포로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여러 공동체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러한 처신으로 과연 우리가 누구를 복음화하고자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님께서는 “지나친 성직주의” 때문에 “의사 결정에서 밀려나 있는” 평신도의 책임을 증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신다. 이에 덧붙여 “한층 섬세한 여성들을 위한 기회들이 교회 안에서 더욱 확대되어야” 하고,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러하다고 말씀하신다. “여성들의 합법적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가볍게 넘겨 버릴 수만은 없다.” 젊은이들 또한 더욱 큰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수많은 지역에서 성소 부족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교황님께서는 “신학교들이 그 동기가 무엇이든지 무턱대고 성직 후보자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강조하신다.
토착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교는 단 하나의 문화적 표현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교회의 얼굴은 “다양하다.” “우리는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표현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그들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발전시킨 표현 양식을 따라 하라고 주장할 수 없다.” 교황님께서는 “대중신심을 강조하는 것은 …… 복음화하는 적극적인 힘”이라고 역설하시며, 신학자들의 연구를 격려하시고 “교회와 신학은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키시며 “탁상 신학”에 만족하지 말라고 촉구하신다.
교황님께서는 “강론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강조하시며, “이 중요한 직무와 관련한 수많은 요청들을 우리가 모른 체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강론은 “간략해야 하고 연설이나 강의와 같아서는 안 된다.” 강론은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어야 하고, 특히 “순전히 도덕적이거나 교리적인”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황님께서는 강론 준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준비가 되지 않은 강론자는 ‘영성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 훌륭한 강론은 언제나 긍정적이며 언제나 희망을 주고 신자들이 “부정의 덫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복음 선포는 그 자체로 긍정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곧 복음 선포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언제나 대화에 열려 있고, 인내와 온유,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환대를 담고 있어야 한다”. 현대 세계의 도전들과 관련하여, 교황님께서는 현재의 경제 체계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다고 규탄하신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인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회용” 문화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왔다. 거기에서 “배제된 이들은 ‘착취당하는 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사람들’, 곧 ‘잉여 인간들’”이다. “이로써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흔히 실질적인 새로운 폭정, 곧 ‘시장 자율’이라는 새로운 폭정이 생겨났다.” 여기에서는 ‘금융 투기’와 ‘만연한 부정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나 세금 회피’가 판을 치고 있다. 교황님께서는 “종교 자유 침해”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새로운 박해”를 규탄하신다. “많은 곳에서, 이것이 무차별주의나 상대주의의 만연보다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어서 교황님께서는 가정이 “심각한 문화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혼인이 사회에 가져다주는 중요한 공헌을 강조하시며, “현대 후기와 세계화 시대의 개인주의는 인간관계의 발전과 안정성을 약화시키고 가정의 유대를 왜곡하는 생활 방식을 선호한다.”고 강조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화와 인간 진보의 긴밀한 연관성”과 “사람들의 삶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하여 견해를 밝히는” 목자의 권리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신다. “어느 누구도 종교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개인 생활의 내적 성역으로 치부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고 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사회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연유로 저는 교회가 가난하고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할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신다. “정치는, 비록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이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들을 더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이어서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신다. “어떠한 교회 공동체든” 가난한 이들을 잊어도 그만이라고 믿는다면 “붕괴”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회의 가장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신다. “노숙자, 중독자, 난민, 토착민, 점점 더 소외되고 버림받는 노인들”과 이민들을 위하여, 교황님께서는 “관대한 개방성”을 권고하신다. 또한 인신매매 피해자들과 새로운 노예 형태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네 도시에는 이 악명 높은 범죄망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의로 침묵의 공모를 함으로써 이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 “배척과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을 감내하는 여성들은 이중으로 가난한 이들이다.” “교회가 특별한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고자 하는 힘없는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고 무죄한 태아도 포함된다. 최근 들어, 태아의 인간 존엄성을 부인하려는 시도들이 자행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확고부동하다. …… 인간 생명을 없앰으로써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에 대한 존중을 호소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깨지기 쉬운 세상을 지키고 보호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평화의 주제에 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침묵하게 하거나 유화시키려는” 거짓 화해의 시도들에 맞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고 단언하신다.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교황님께서는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신다. “시간이 공간보다 앞선다.”는 말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즉각적인 결과에 치중하지 말고” 일하라는 의미이다. “일치가 분열을 이긴다.”는 말은 “다양하면서도 생명을 주는 일치”를 의미한다. “사실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정치나 신앙을 어떤 허언장담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피하라는 의미이다.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는 말은 “세계화와 지역화”를 함께 하라는 의미이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화에는 대화의 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길은 교회가 문을 열고 정치, 사회, 종교, 문화의 모든 분야와 협력하게 이끈다. 교회 일치 운동은 “복음화의 필수적인 길”이다. 서로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매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정교회 형제자매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주교 단체성의 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합의 정신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기회를 갖게 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대화와 우정을 나누는 것이 예수님 제자들의 삶의 일부이다.” “고유의 정체성을 가지고 분명히 기쁘게” 이루어져야 하는 “종교간 대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고 복음화에 저해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과 맺는 관계는 큰 중요성을 지닌다.” 교황님께서는 “무슬림이 서방 국가들에서 누리는 자유에 비추어서도” 이슬람 전통 국가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겸허히” 간청하신다. “폭력적 근본주의 사건들에 직면하여”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이슬람이라면 또 쿠란을 올바로 읽어보면 이는 온갖 폭력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적대적인 일반화는 삼가도록” 촉구하신다. 일부 상황에서 종교의 사유화 시도들에 반대하여, 교황님께서는 “소수의 불가지론자나 비신자를 물론 존중하여야 하지만, 다수의 믿는 이들의 신념을 침묵시키거나 종교 전통들의 부요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독단적으로 이러한 존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신다. 그러고 나서 교황님께서는 신자들과 비신자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거듭 밝히신다.
마지막 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들”에 대하여 다룬다. 이들은 “두려움 없이 성령의 활동에 열려 있는” 이들이고 “언제 어디서나, 반대 받을 때에도 담대하게 복음의 새로움을 선포할 용기”를 지닌 이들이다. 이러한 이들이 “선교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고 그분 백성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며 일하는 복음 선포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를 바라신다. 고통 받는 몸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비판하거나 단죄하는 적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할 때,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바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내 삶의 봉헌은 의롭게 된다.” 교황님께서는 실패나 부족한 결과를 두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풍요로운 결실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고 알아채기 힘들고 양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황 권고는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이 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온유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