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

1. 희망의 학교인 기도

32. 희망을 배우는 첫 번째 중요한 자리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더 이상 내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나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내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희망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나 기대와 연관하여 나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25) 내가 완전한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에도 기도하면 나는 결코 완전히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베트남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13년이라는 긴 옥살이 가운데 9년을 독방에서 지냈습니다. 그는’희망의 기도'(Prayers of Hope)라는 주옥같은 작은 책을 남겼습니다. 13년 동안 한줄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감옥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말씀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희망의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에 그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희망의 증인, 고독한 밤에도 결코 지지 않는 그 위대한 희망의 증인 될 수 있었습니다.

3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에 관한 강해에서 기도와 희망의 긴밀한 관계를 매우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를 열망의 훈련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위대한 실재를 위하여, 곧 하느님 자신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지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예정된 그 위대한 실재를 담기에는 너무 작으므로 넓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은총을 베푸시는 것을)늦추심으로써 우리의 열망을 더 크게하시고, 열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더 넓히시고, 영혼을 넓히심으로써(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능력을 주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린다고 한(필리 2,13 참조) 바오로 사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인간 마음을 넓히고 준비하는 과정을 매우 아름다운 말로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꿀(하느님의 온유하심과 선하심의 상징)로 채우고자 하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가 식초로 가득 차 있다면 어디에다 꿀을 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인 이 그릇을 우선 넓혀야 하고 그다음 식초와 그 냄새도 남지 않도록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이는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예정된 본분에 맞갖은 사람이 됩니다.26)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대해서만 직접 언급하였지만, 우리의 그릇에 식초를 담지 않고 식초 냄새가 배지 않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맞이 할 수 있도록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열리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분이신 우리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역사 현장을 벗어나 자기 행복만 누리는 혼자만의 구석 자리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과 또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는 내적 정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께 간청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기도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피상적이고 편리한 것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하찮고 그릇된 희망입니다. 우리의 열망과 희망을 정화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는 숨겨진 거짓말들에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뜻 아니한 허물을 누가 알겠습니까?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8],13).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나를 정당화하지도 구원하지도 않습니다. 무뎌진 양심 그리고 내안에 있는 악한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불찰의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러한 거짓 속에 안주하고자 할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용서할 수 없고 참된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날 때 내 양심은 일깨워지고 더 이상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양심은 나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동시대인들이나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이신 분에게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34. 기도가 이러한 정화의 힘을 발휘하려면, 한편으로 기도는 매우 개인적인 것, 곧 나의 자아와 살아계신 하느님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도는 교회와 성인들의 훌륭한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계속 가르쳐 주고 계시는 전례 기도를 통하여 꾸준히 인도되고 빛을 받아야합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그의 영성 수련서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주님의 기도, 성모송, 전례 기도 등 교회 기도문만 드려 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27) 기도할 때에는 이렇게 언제나 공적 기도와 개인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길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정화되어 하느님께 열려 있고 우리 이웃에게 봉사할 채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봉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뜻하는 희망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이는 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 희망으로 우리는 만물이 ‘전도된 종말’로 나아가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열린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에서도 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언제나 참으로 인간다운 희망이 있습니다.

II. 희망을 배우는 자리인 활동과 고통

35. 인간의 모든 진지하고 올바른 행위는 희망의 활동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크고 작은 희망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계속되는 여행에 중요한 여러 과제를 완수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더 밝고 더 인간적인 세상을 향하여 노력함으로써 미래의 문이 열리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실패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좌절에도 스러지지 않는 위대한 희망의 빛으로 깨우침을 얻지 않으면, 내 삶과 세상의 미래를 위한 날마다의 노력에서 지치거나 광신주의에 빠지고 말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 또는 정치적 경제적 권위자가 약속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희망할 수 없다면, 우리 삶은 곧 희망 없는 삶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속에서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속에서 희망할 것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내가 언제나 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내 삶과 역사 전체가 온갖 좌절에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굳건히 지탱되고 이로써 그 고유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는 굳은 희망, 오로지 이러한 희망만이 행동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설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인간 본성에 따른 모든 한계가 포함된 인간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하느님 나라는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희망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표현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언제나 우리가 얻기에 합당한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마치 사랑받는 것이 ‘공로로 받는’ 어떤 상급이 결코 될 수 없고 언제나 하나의 선물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함께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 앞에서 무심할 수 없고 따라서 역사의 전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열어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리와 사랑과 선에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이 한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협력자”(1코린 3,9 ; 1테살 3,2 참조)로서 세상의 구원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우리도 현재와 미래를 파괴시킬 수 있는 독과 더러움에서 우리 삶과 세상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원천을 밝히고 이를 훼손되지 않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선물로 받은 피조물을 그 본질적인 필요와 궁극적인 목적에 따라 올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거나 압도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일지라도 이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의 활동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약속에 바탕을 둔 그 위대한 희망이야말로 좋은 때든 나쁜 때든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우리의 활동을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36. 활동처럼, 고통도 우리 인간 삶의 한 부분입니다. 고통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역사에 걸쳐 축적되고 지금도 계속 쌓여가고 있는 커다란 죄 때문에 생깁니다. 분명히 우리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무고한 이들이 고통 받는 일이 없게 하고, 고통을 달래 주며,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정의의 의무인 동시에 사랑의 의무이며, 그리스도인 삶과 모든 참된 인간 삶의 근본적 요구에 속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없애는 데에서는 큰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무고한 이들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은 증가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지만, 세상에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유한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고통의 끊임없는 원인이 되는 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친히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신 하느님께서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요한 1,29)이 힘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치유에 대한 희망이 역사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외적 흐름에서는 죄의 세력이 어쩔 수 없이 존속할 것을 인식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선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입니다.

37. 다시 우리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고통을 줄이고 고통에 맞서 싸우고자 노력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에서 도망침으로써 고통을 피하려고 할 때, 또 진리와 사랑과 선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는 공허한 삶으로 떠돌게 됩니다. 그런데 삶에는 아픔이 거의 없을지 모르지만 무의미함과 고독으로 훨씬 더 큰 어둠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치유되는 것은 고통을 비켜 피하거나 고통에서 도망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며 무한한 사랑으로 고통 받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고통의 의미를 찾는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베트남의 레 바오 티 바오로 순교자(+ 1857)의 편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는 신앙에서 솟아나는 희망의 힘이 고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묶여 있는 나 바오로가 날마다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알림은 여러분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나와 함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시편 135[135]편 참조). 이 감옥은 영원한 지옥에 비길 만하니 족쇄, 쇠사슬, 포승 등 온갖 종류의 잔인한 형벌과 더불어 미움, 복수, 비방, 폭언, 악행, 거짓 맹세,저주와 괴로움과 근심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옛적에 세 젊은이를 불가마에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 고난에서 구하시고 이 고난을 달게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공포로 몰아넣는 이러한 형벌 가운데서도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있으니,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커룹들과 사람들 위에 좌정하신(시편 80[79],2 참조)주님, 황제와 그 관리와 신하들이 날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광경을 보면서 제가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는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차라리 사지가 찢겨 죽어서 그 사랑을 증언하기를 열망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저를 구원하시며 붙들어 주시어 제 연약함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듣고서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기쁨 가운데 끊임없이 감사드리고 나와 함께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과 나의 믿음을 일치시키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폭풍우 가운데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희망의 닻을 던집니다.”28) 이것은 ‘지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포로수용소의 온갖 공포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압제자들이 희생자에게 가하는 고문 외에도 희생자들 안에서도 악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잔인한 박해자의 또 다른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참으로 지옥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시편의 진리도 드러나 있습니다.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어둠이 나를 뒤덮고 내 주위의 빛이 밤이 되었으면!’하여도 암흑인 듯 광명인 듯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시편 139[138], 8-12; 시편 23[22],4도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시어 지옥에 떨어진 이들 곁에 계시면서 그들의 어둠을 빛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고통과 고문은 여전히 끔찍하고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희망의 별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의 닻이 바로 하느님의 옥좌에 가닿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활개를 치기보다는 빛이 승리로 빛나고, 고통이 고통인 그대로 찬미가가 됩니다.

38. 인간다움의 참된 척도는 고통과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하게 판가름됩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음'(com-passio)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나 개인들 스스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회는 고통 받는 구성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개인 자신도 고통에서 정화와 성장의 길, 희망의 여정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고통 받는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고통을 받아들여 내 것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고통은 나누어진 고통, 그 안에는 다른 이도 함께 있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의 빛으로 물듭니다. ‘위로’를 뜻하는 라틴어 ‘con-solatio’이런 뜻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독한 다른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더 이상 고독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선과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인간다움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안위가 결국 진리와 정의보다 더 중요하다면 더 강한 사람의 힘이 우세해질 것이고 폭력과 거짓이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가 내 안위와 육체적 행복보다 앞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 자체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면 결국 사랑에 ‘예’하고 대답하는 것마저 고통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나를 잘라내고 상처 받게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를 버리는 고통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단순한 이기심이 되고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39. 다른 이와 함께, 다른 이를 위하여 고통 받는 것,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고통받는 것,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랑때문에 고통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다움의 근본적인 요소이며 이를 저버린다면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가 그 사람이 될 만큼 그가 나에게 중요합니까? 고통의 대가를 치를 만큼 진리가 나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사랑의 약속이 나를 내놓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위대한 것입니까? 인간다움에 결정적인 이러한 유형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깊이의 능력을 인간 안에 심어 준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룬 탁월한 공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실재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진리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고통 받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은 고통 받으실 수 없지만 함께 고통을 겪으실 수는 있다(Impassibilis est Deus, sed non incompassibilis).”29)는 말로 이를 훌륭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너무나 귀중히 여기셨으므로 몸소 사람이 디시어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드러나 듯이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곧 살과 피로 사람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고통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우리와 함께 체험하고 짊어지는 분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모든 고통을 우리와 함께 체험하고 짊어지는 분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모든 고통에는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위로(con-solatio)가 있으며, 그래서 희망의 별이 떠오릅니다. 여러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을때 우리는 언제 따뜻한 방문이라든지 내적 외적 상처를 위한 치유라든지 위기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는 것과 같은 크고 작은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시련을 겪을 때에는 이러한 희망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힘든 시련이 닥쳐서 나 자신의 행복이나 성공이나 소유보다도 진리를 앞세워야 하는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바로 이러한 참되고 커다란 희망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증인들, 곧 ㅈ신을 온전히 바쳐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는 순교자들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치는 사소한 선택들에서도 안위보다는 선을 우선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삶을 온전하게 사는 법임을 안다면, 그러한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 받을 수 있는 역량은 인간다움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량은 우리가 우리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 키워 나가는 희망이 어떤 것이고 얼마나 큰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인들은 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보여 주신 대로 인간 삶의 위대한 여정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40. 여기서 일상생활에 관련된 말씀을 짧게 덧붙일까 합니다. 오늘날에는 덜 실천되고 있지만 최근까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던 신심형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성가시게 공격해 오는 일상의 사소한 어려움들을 ‘봉헌’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신심에는 과장됨이 있었고 건전하지 못하게 적용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본질적이고 유익한 점이 있지 않았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봉헌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언가를 봉헌한 사람들은 이 자잘한 어려움들을 그리스도의 위대한 연민(com-passio)에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인류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연민의 보고를 이루는 데에 일조할 수 잇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생활의 작은 불편함마저도 의미를 얻고 선과 인간 사랑의 경륜에 이바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신심을 되살리는 것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I.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인 심판

41. 교회의 위대한 신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동정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며 십자가의 부활을 거쳐 다시 오심에 이르는 신비를 이야기하는 핵심 부분의 마지막에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오랜 옛날부터 심판의 전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 삶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양심의 소리로, 또한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희망으로 날마다 삶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뒤를 돌아보거나 위를 올려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되풀이하여 선포하신 정의의 때를 향하여 앞을 내다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전망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현재에도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역사적 우주적 외연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건물들의 내부 배치를 보면, 동쪽 벽에는 임금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희망의 상징으로 그리고, 서쪽 벽에는 대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신자들을 바라보고 동반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삶에 대한 책임을 상징하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것이 통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화상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화가들이 희망의 광채 보다는 불길하고 침울한 측면에 더욱 이끌려 이러한 측면이 점점 더 부각됨에 따라 희망은 흔히 공포 아래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42. 현대에 들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생각은 점차 희미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화되어 무엇보다도 신자 개인의 영혼 구원을 지향하게 된 반면, 세계 역사에 대한 성찰은 진보의 개념에 크게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는 근본적인 내용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것뿐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무신론은 그 기원이나 목적에서 볼 때 세계와 세계 역사의 불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일종의 도덕주의였습니다. 엄청난 불의와 무고한 고통과 잔인한 권력으로 얼룩진 세상이 좋으신 하느님의 작품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 책임이 있는 하느님은 정의로운 하느님이 아니며, 좋으신 하느님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덕성 때문에 이 하느님은 반대를 받습니다.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 자신이 정의를 세우도록 부름받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세상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반항하는 것이 납득할 만 해도 , 어떤 하느님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주장은 주제넘고 본질적으로 거짓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엄청난 잔인함과 정의에 대한 침해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그러한 주장이 본질적으로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정의를 이루어야 하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어떤 이도, 어떤 것도, 수 세기 동안 지속된 고통에 대해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어떤 이도, 어떤 것도, 오만한 권력이 더 이상 온갖 기만적인 이념의 가면 아래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보장하지 못합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위대한 사상가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로 아도르노가 무신론과 유신론에 모두 비판적이었던 것은 이때문입니다. 호르크 하이머는 하느님을 이 세상 것으로 대체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선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의 모습 또한 거부하였습니다. 구약의 우상 금지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서 그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동경은 세계 역사를 향한 열망의 외침입니다. 아도르노 역시 이러한 전적인 우상 거부를 확고히 지지합니다. 이는 당연히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어떤 ‘모습’도 배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 그는 또한 이러한 ‘부정적’ 변증법을 꾸준히 강조하고, 참된 정의는 “현재의 고통이 제가될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것이 되돌려지는”30) 세상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긍정적인 상징, 그래서 그에게는 적절하지 않는 상징으로 표현하자면, 죽은 이들의 부활 없이는 정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관념론이나 절대 정신의 영역에는 전혀 낯선 것, 곧 육신의 부활”31)을 포함해야 합니다.

43.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첫 번째 계명에 담겨 있는 엄격한 우상 금지에서 언제나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탈출 20,4 참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부정신학의 진리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유사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둘 사이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32) 어쨌든, 믿는 이라면 우상 금지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처럼 유신론과 무신론을 모두 ‘부정’하는데 까지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에게 ‘모습’을 부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안에서 그릇된 하느님 모습들이 극단적으로 부인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타락한 인간의 조건을 몸소 받아들여 함께 나눔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의 참된 면모를 드러내십니다. 이 무고한 수난자가 희망에 대한 확신을 이루어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지만 신앙을 통하여 어렴풋이 알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를 이루실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부활이 있습니다.33) 과거의 고통을 ‘없애고’ 모든 것을 바로잡는 보상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희망입니다. 이러한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은 최근 여러 세기의 격동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정의의 문제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거,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 삶에서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완성이나 우리가 기다리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인 요구는 분명히 인간이 영원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믿음의 중요한 동기가 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생명에 대한 필요성이 온전히 납득되려면 역사가 불의로 끝날 수 없다는 것과 연관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44. 정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맞서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에페 2,12 참조). 하느님만이 정의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줍니다. 최후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두려운 장면이 아니라 희망의 장면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희망의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두려운 장면이 아니냐고 물어 온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책임을 일깨우는 장면이며, 그래서 두려운 장면입니다. 힐라리오 성인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사랑 안에 있다고 말한 그 두려움입니다. 35) 하느님께서는 정의이시며 정의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안이고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정의 안에는 은총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의와 은총은 그 올바른 내적 관계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은총은 정의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은총은 그른 것을 옳게 만들지 않습니다. 은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였든지, 결국 모두 똑같아지도록 모든 것을 닦아 내버리는 지우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러한 하늘 나라와 이러한 은총을 반대한 것은 옳았습니다. 결국, 악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희생시킨 이들과 나란히 영원한 잔칫상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정의로운 심판을 예고하는 듯한 플라톤의 글귀를 인용할까 합니다. 이 글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진리이며 도움이 됩니다. 신화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지만, 플라톤은 결국 영혼들이 맨몸으로 판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애매함 없이 확실하게 진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판관 앞에서는 그들이 역사상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진실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만이 중요합니다. “판관은 가끔 임금이나 군주나 세력가를 심판해야 하는데, 그 영혼에서 도무지 건전함을 찾아 볼 수 없고 온갖 위증과 악행의 흔적만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 그 영혼은 거짓말과 허영으로 꼬이고 뒤틀려 있으며 영혼이 발전되는 과정에 진리가 설 자리가 전혀 없었으므로 똑바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권력과 사치와 오만과 방탕 때문에 이 영혼은 온갖 기형과 추함으로 가득하여, 판관은 그를 자세히 검사한 다음 곧바로 감옥으로 보낸다. 감옥에 도착하면 바로 적절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때로는 깨끗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다른 영혼이 판관의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면 판관은 놀라 감탄하며 그를 축복받은 이들의 섬으로 보낸다.”36)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루카 15,19-31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만과 호사로 파괴되어 자기 자신과 가난한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만든 영혼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는 물질적 쾌락에 사로잡히고 다른 사람을 잊고 지내며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구렁으로서, 결국 달랠 수 없는 강렬한 목마름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이후의 최종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특히 초기 유다교에서 발견되는 개념, 말하자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최종 판결이 아직 선언되지 않은 중간 상태의 개념을 다루고 계시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45. 초기 유다교에서 말하는 중간 상태의 개념은 이러한 영혼들이 단순히 일종의 임시 보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비유가 보여 주듯이 이미 벌을 받고 있거나 잠정적으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영혼을 성장시키는 정화와 치유가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이러한 개념들을 받아들였으며 서방 교회에서 이 개념들은 점차 연옥 교리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역사적 전개의 복잡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삶의 선택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삶이 판관 앞에 놓이게 됩니다. 일생을 통하여 어떠한 형태를 띠게 된 우리의 선택은 다양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진리를 바라고 기꺼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조리 파괴한 사람들,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인 사람들, 자기 안의 모든 사랑을 억누른 채 증오로 살아 온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끔찍한 생각이지만, 우리 역사의 몇몇 인물에게서도 이러한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치유책도 없으며 선의 파괴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37) 반면에 완전무결하고, 온전히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으며, 이웃에게 활짝 열려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가 심지어 그들 존재 전체의 지향점이 되고 하느님을 향한 여정만이 현재의 그들의 모습을 완성시킵니다.

46.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양쪽의 경우 모두 인간 삶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그들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는 궁극적으로 진리와 사랑과 하느님께 내적으로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구체적인 선택에서는 끊임없이 대두되는 악과의 타협이 이를 가립니다. 많은 더러움이 순수함을 가리지만, 순수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으면서 온갖 비열한 것 속에서도 계속해서 다시 고개를 들고 영혼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관 앞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면서 쌓인 모든 더러움이 갑자기 대수롭지 않게 되겠습니까?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각자의 고유한 환경에 따라 하느님의 심판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볼 수도 없고 경험해 보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들을 개념화하지 못합니다. 바오로는 우선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의 기초 위에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기초는 영원합니다. 이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그 위에 우리 삶을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는 죽음에서도 이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게 되고,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 자신은 구원을 받겠지만 불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듯 할 것입니다”(1코린 3,12-15).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구원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고, 지어 놓은 것의 일부가 타버릴 수도 있으며, 온전히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혼인 잔칫상에 우리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각자 “불”을 지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47. 최근의 일부 신학자들은 태워 버리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그 불이 바로 판관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남은 최종적인 심판 행위입니다. 그분 눈길 앞에서 모든 거짓은 녹아 버립니다. 그분과 이러한 만남은 우리를 태우고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함으로써 참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쌓아 올리는 모든 것은 속이 비어있는 지푸라기, 텅 빈 허세로 드러나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주는 아픔 가운데에서 더럽고 병든 우리 삶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불을 통하여” 분명 고통스러운 변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분의 눈길, 그분 마음이 어루만져 주시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받은 아픔입니다. 그분 사랑의 거룩한 힘이 불길처럼 우리를 뚫고 지나가 온전한 우리 자신, 그리하여 온전한 하느님 사람이 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의와 은총의 상호 관계도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적어도 그리스도와 진리와 사랑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 죄가 우리를 영원히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죄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이미 불타 없어졌습니다. 심판 때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의 모든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커다란 힘을 체험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의 아픔은 우리 구원이며 우리 기쁨이 됩니다. 분명,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위한 불타는 ‘기간'(tempus)을 이 세상의 시간의 잣대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만남에서 변화의 ‘순간'(momentum)은 지상의 시간 계산법을 벗어납니다. 그것은 마음의 시간이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건너가는’ 시간입니다.39) 하느님의 심판은 정의이며 또한 은총이기 때문에 희망입니다. 심판이 은총이기만 하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서의 모든 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역사와 하느님께 정의라는 중요한 문제를 묻고 하느님께는 이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설명 하셔야 할 것입니다. 심판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심판은 결국 우리에게 두려움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강생은 심판과 은총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켜 정의가 확실히 세워지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필리 2, 12) 우리 구원을 위하여 힘씀니다. 그럼에도 은총은 우리가 모두 희망할 수 있게 하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 요한 2,1 참조)이신 판관을 만나러 확신을 갖고 나갈 수 있게 합니다.

48. 여기서 그리스도교 희망을 실천하는 데에 중요한 한 가지 사항을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초기 유다교 사상에는 중간 상태에 있는 죽은 이들을 기도로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예를 들어 마카 12,38-45 참조, 기원 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상응하는 관습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관행은 동방과 서방 교회에 공통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동방 교회는 ‘사후’에 영혼들이 정화와 속죄를 위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중간 상태에 다양한 수준의 복과 고통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영혼은 성찬례와 기도와 자선을 통하여 ‘위로와 기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사후까지 미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죽음의 경계 너머까지 계속되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확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위안의 이유가 됩니다.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에게 애정의 표시나 감사의 몸짓, 또는 용서의 간청을 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연옥’이 단지 판관이며 구세주이신 주님과 만남 안에서 불을 통해 정화되는 것일 뿐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어떻게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그 누구도 온전히 홀로 동떨어진 섬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수많은 관계를 통하여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이루는 것에서 다른 이들의 삶이 끊임없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반대로 내 삶도 다른 이들의 삶에 흘러 들어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한 나의 기도는 심지어 그가 죽은 다음에라도 그에게 무관한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상호 연결 안에서, 다른 이에게 감사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의 정화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상의 시간을 하느님의 시간으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들의 친교안에 단순한 지상의 시간은 극복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은 언제라도 늦지 않으며 결코 헛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햇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희망의 중요한 요소를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것은 나를 위한 희망도 됩니다.40)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가 나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는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구원받고 그들에게도 희망의 별이 떠오르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

49. 8세기 또는 9세기에 작성되어 천년이 넘도록 전해 온 찬미가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바다의 별’이라고 부르며 인사드립니다(Ave maris stella). 인간의 삶은 여정입니다. 그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또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삶은 때로 암흑과 폭풍우가 들이닥치는 역사의 바다를 헤쳐 나아가는 항해와 같고, 그 항해를 하는 동안 우리는 방향을 가리켜 주는 별들을 살핍니다. 우리 삶의 참된 별들은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희망의 등불입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모든 그림자 위로 떠오른 태양과 같은 참된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있는 등불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빛으로 우리의 길을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보다 더 훌륭한 희망의 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예”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우리 세상의 문을 하느님께로 열어주셨으며, 하느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도록 품어 주신 살아있는 계약의 궤가 되셨습니다(요한 1,14 참조).

50.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한 성모님, 성모님께서는 시메온처럼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루카 2,25) 한나처럼 “예루살렘의 속량을” 희망하는 겸손하고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희망을, 곧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루카 1,55 참조)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성경에 온전히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의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낳게 되리라고 말했을 때 성모님께서 느꼈을 거룩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 성모님의 “예”라는 대답을 통해, 오랜 시간의 희망이 실현되어 이 세상과 역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막중한 임무 앞에 순종하시어 “예”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거룩한 기쁨에 벅차 서둘러 유다의 산악지방을 지나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의 성모님 모습은, 역사의 산악 지역을 지나 장차 세상의 희망을 품게 될 교회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앞으로 영원히 울려 퍼질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로 표현하셨던 그 기쁨과 더불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종이 이 세상에서 겪으신 고통에 관한 예언자 불길한 말도 들으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에는, 그 위로 빛에 둘러싸여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천사들도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낮은 모습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늙은 시메온은 성모님께 영혼이 칼레 꿰찔리는 듯(루카 2,35 참조) 아플 것이며,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에 따라 세우셔야 하는 가족, 당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로(루카 11,27-28 참조) 이루어지는 그 가족이 더 커질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 직무의 시작을 뜻하는 그 큰 기쁨 속에도, 성모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미 체험하셨습니다(루카 4,28 참조).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둘러싼 적대와 반대의 힘이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을 보셔야 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의 때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구원자, 다윗의 후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실패자처럼 죄인들 사이에서 조롱받으며 돌아가시는 것을 보셔야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십자가에서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드님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디신 것입니다. 슬픔의 칼이 성모님의 가슴을 꿰찔렀습니다. 희망이 죽었습니까? 세상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삶의 목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까? 그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탄생을 예고 받으셨을 때 느꼈던 두려움에 대답하는 천사의 소리를 저 깊은 곳에서 다시 들으셨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루카 1,30). 아드님이신 주님께서도 얼마나 여러 번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해골 터 에서 밤을 보내시는 동안 성모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다시 들으셨을 것입니다. 배신당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그때 나자렛에서 천사는 성모님께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3). 그 나라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말씀에 힘입어 성모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굳건히 간직하셨던 이러한 믿음으로 성모님께서는 부활절 아침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성모님의 가슴을 깊이 울렸고 제자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디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다음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한마음으로 기도하였고(사도 1,14 참조) 오순절에 그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느 상상했던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시작된 이 “나라”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여전히 제자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어머니로, 희망의 어머니로 계십니다. 거룩한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저희 어머니시여, 저희에게 당신과 함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분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저희에게 보여 주소서! 바다의 별이시여, 저희에게 빛을 비추어 저희의 길을 이끌어 주소서!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3년
207년 11월 30일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 1. ‘라틴 비문집’ (Corpus Inscriptionum Latinanum) 6, 26003.
2.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교의 관한 시(Poema dogmatica), 33-64)
3.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17-1821 항.
4. 성 토마스 아퀴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2-2ae, q.4, a.1 참조.
5. H. Köster,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emt 8(1969), 585.
6. 성 암브로시오, ‘아우 사티루스의 죽음'(De excessu fratris sui Satyri) 2, 47, ‘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Corpus Scriptorum Eccestiasticorum Latinorum: CSEL)73,274.
7. ‘아우 사티루스의 죽음’ 2,46. CSEL 73, 273.
8. 성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4,25-15,28, ‘편지’ 130(Ep. 130 Ad Probam), CSEL 44,68-73 참조.
9.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5항 참조.
10. Jean Giono, Les vraies richesses, Paris, 1936, 서문 : Henri de Lubac, Catholicisme. Aspects sociaux du dogme, Paris, 1983, 7에서 재인용.
11. 성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24, ‘편지’ 130, Csel 44,67.
12.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묵상집'(Sentetiae) 3,118,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bristianorum (Series Latina) : CCL] 6/2,215.
13.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묵상집’, 3,71, CCL 6/2, 107-108 참조.
14. Francis Bacon, ‘신기관'(Novum Organum), 1, 117.
15. ‘신기관’, 1,129 참조.
16. Francis Bacon, ‘새로운 아틀란티스’ (New Atlantis)참조.
17. Immanuel Kant, ‘칸트 전집'(Werke), 4, W.Weischedel 편, 1956, 777.
18. Immanuel Kant, ‘만물의 끝'(Das Ende aller Dinge, in Werke), 칸트 전집’ 6, W. Weischedel 편, 1964, 190.
19. 막시무스, ‘사랑의 단장'(Capita de caritate), Centuria 1, PG 90, 965.
20. ‘사랑의 단장’, Centuria 1, cap, 1, PG 90,962-966 참조.
21.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10, 43, 70, CSEL 33,279.
22.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Sermones), 340, 3, ‘라틴 교부 총서’ (Patrologia Latina:PL), 38,1484 ; 참조: F. Van der Meer, Augustinus der Seelsorger, 1951,318.
23. ‘설교집’, 39, 4, PL 38, 1481.
24. ‘고백록’, 10,43,69, CSEL 33,279.
25.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7항 참조.
26. 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서간 강해'(Epistulam Ioannis), 4,6,PL 35, 2008s 참조.
27.Nguyen Va Thuan, Tetimony of Hope, Bosthon 2000, 156-157.
28. 성무일도, 독서 기도 11월 24일.
29. 성 클레보르의 성 베르나르도, ‘아가 강론'(Sermones in Canticum), Semo 26, 5, PL 183, 906.
30. Theodor W. Adorno, Negative Dialektik ,1966, 제3부, 3, 11, Gesammelte Schriften 6, Frankfurt am Main, 1973, 395.
31. Negative Dialektik , 제2부.
32. ‘신앙 규정 편람'(DS), 806.
33. ‘가톨릭 교회 교리서’,988-1004 항 참조.
34. ‘가톨릭 교회 교리서’,1040 항 참조.
35. 성 힐라리오, ‘시편 강해'(Tractatus super Psalmos), 127, 1-3, CSEL 22, 628-630 참조.
36. 플라톤, ‘고르기아스'(Gorgias), 525-526c.
37.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3-1037 항
38.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1029 항
39. ‘가톨릭 교회 교리서’,1030-1032 항 참조.
40.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2 항 참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