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ENCYCLICAL LETTER
SPE SALVI
OF THE SUPREME PONTIFF
BENEDICT XVI
TO THE BISHOPS
PRIESTS AND DEACONS
MEN AND WOMEN RELIGIOUS
AND ALL THE LAY FAITHFUL
ON CHRISTIAN HOPE

그리스도교 희망에 관하여

주교와 신부, 부제, 남녀수도자,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차례

1. 신앙은 희망

2.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

3.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4.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

5.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

6.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 모습

7.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
1) 희망의 학교인 기도
2) 희망을 배우는 자리인 활동과 고통
3)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인 심판

8.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


서론

1.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로마 8,24 : Spe salvi facti sumus).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당연한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희망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비록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현재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희망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단지 그러한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이 확신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은 희망이다.

2. 이 시의 적절한 질문을 다루기에 앞서 희망에 관한 성경의 증언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 구절에서 ‘신앙’과 ‘희망’이 호환되어 사용될 정도로 ‘희망’은 성경에서 신앙의 중심 단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확고한 믿음”(10,22)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10,23)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의 의미이자 이유인 로고스에 관한 답을 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고할 때(3,15 참조), 이 ‘희망’은 ‘신앙’과 똑같은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가진 이후의 삶을 그 이전의 삶이나 다른 종교인들의 삶과 비교해 보면, 든든한 희망의 선물을 받은 것이 이들의 의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에 있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에페 2,12) 그들에게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그들에게 신들이 있었다는 것, 종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들은 의심스러운 존재로 판명되었고 그들의 모순된 신화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신들이 있었지만 “하느님 없이”살아서 계속 어두운 세계에 머물고 음울한 미래를 마주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어떤 비문에는 “우리는 얼마나 빨리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가!”(In nihil ab nihilo quam cito recedimus) 1)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자 한 것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말을 합니다. 그들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1테살 4,13)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미래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맞이하게 될지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대강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확실한 실재라는 확신이 서야지만 현재도 살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단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전하는 ‘기쁜 소식’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소식은 ‘정보 전달적'(infomativus)인 것 만이 아니라 ‘실천적'(perfomativus)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이 알 수 있는 것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의 어두웠던 문, 미래의 암울한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이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희망하는 이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습니다.

3.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구원’인 희망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의 핵심은 앞에서 인용한 에페소서에 나오는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에페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았기 때문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참된 하느님을 알게된다는 것은 희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늘 함께 살아가며 이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 하느님과 실제로 만나 희망을 가지게 된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처음으로 또 참으로 만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우리 시대 성인의 모범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시성하신 아프리카 출신의 요세피나 바키타를 생각해 봅니다. 그녀는 자신도 정확히 모르지만 1869년 무렵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때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피가 나도록 매를 맞고 수단의 노예시장에서 다섯 차례나 팔려갔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한 장군의 어머니와 부인의 몸종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일 피가 나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평생 몸에 144개의 흉터를 지닌 채로 살게되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1882년 이탈리아 상인을 통하여 당시 이탈리아 공사였던 칼리스토 레냐니에게 넘겨졌습니다. 레냐니는 마흐디주의자들의 침입이 있자 이탈리아로 귀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요세피나 바키타는 그때까지 자신을 소유해 왔던 무시무시한 ‘주인들’ 말고 전혀 다른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배운지 얼마 안된 베네치아 사투리로 살아 계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파론'(paro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거나 기껏해야 말 잘듣는 노예로 여기는 주인들만을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주인들 위에 계신 최고의 주님이신 ‘파론’이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주님께서는 선하신 분, 곧 선 자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께서 그녀를 알고 계시고 창조하셨으며 참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다른 모든 주인이 그저 비천한 종이 되고 마는 지극히 높으신 ‘파론’의 사랑을 그녀도 받은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녀를 알고 사랑하시고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 주님께서는 스스로 매를 맞으시는 운명을 받아들이셨고 이제는 ‘성부 오른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그녀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덜 잔인한 주인을 만나기 바라는 소박한 희망이 아니라 위대한 희망입니다. “저는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 사랑이 저를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삶은 행복합니다.” 이러한 희망을 알게되어 그녀는 ‘구원’ 되었습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바오로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고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없기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파론’과 떨어지기 싫었던 것입니다. 1890년 1월 9일 그녀는 베니스의 총대주교에게 세례와 견진을 받고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1896년 12월 8일 베로나에서 그녀는 카노사 수녀회에 입회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수도원의 제의실 일과 봉쇄 구역 문지기 일을 하면서도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면 선교를 독려했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만나서 얻게 된 해방을 널리 펼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 안에 자리 잡아 자신을 ‘구원’한 희망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이 희망을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

4.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신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도 ‘정보 전달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일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 만남이 의미하는 희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초기 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아프리카의 노예 소녀였던 바키타의 경험이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의 매 맞고 팔려간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같은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피나는 투쟁에서 실패한 스파르타쿠스처럼 사회 개혁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또한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담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곧 최고의 주님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과 만남, 종살이의 고통보다도 더 강력한, 그래서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점은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에서 매우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옥중에서 쓴 매우 사적인 것으로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스가 자신의 주인인 필레몬에게 전하도록 부탁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도망친 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10-16). 사회적 지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나인 교회의 신자가 되면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고 같은 성령을 마시고 주님의 몸을 함께 모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외적 구조는 불변해도 사회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켰습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는 영원한 고향이 없고 미래의 고향을 찾는다고 말한 것은(히브 11,13-16;필레 3,20참조) 오직 미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사회를 타향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공동 여정의 목적지이며 이 여정 중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에 속합니다.

5. 한 가지 점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1,18-31)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낮은 사회 계층에 속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바키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희망을 체험하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귀족과 교양있는 계층의 사람들도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였습니다. 이들 역시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그 신뢰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의 국교는 빈틈없이 진행되는 단순한 예식으로 굳어져 그저 ‘정치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철학적 합리주의는 신들을 비현실 세계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주의 힘들 안에서 신성한 존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기도드릴 수 있는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콜로 2,8) 따르는 삶을 대비시켜 그 시대 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글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와서 새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하였을 때 점성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별들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궤도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 사실 이 장면에서 그 당시의 세계관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 오늘날 또 다른 방식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정령들이나 물질의 법칙이 세상과 인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하느님께서 별들을, 곧 우주를 지배하십니다. 물질의 법칙이나 진화의 법칙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와 사랑 곧 인격이 궁극적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분을 알고 이분께서 우리를 아시면 물질적 요소의 냉엄한 힘은 더 이상 긍극적 결정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주나 우주 법칙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고대에는 이러한 인식으로 순수한 정신으로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단순한 법칙들과 물질적 우연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모든 것 안에 또한 모든 것 위에는 인격적 의지가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나타나신 성령께서 계십니다.3)

6.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석관(石棺)은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죽음과 연관하여 이러한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고대 석관에서 그리스도는 원칙적으로 철학자와 목자 두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당시 철학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처럼 어려운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철학자는 참다운 인간이 되는 중요한 기술, 곧 삶의 기술과 죽음의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철학자인 척, 곧 인생의 교사인 척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진정한 삶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도 말론 돈을 버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참으로 알려줄 수 있는 진정한 철학자를 더욱 찾았습니다. 3세기 말엽 로마의 한 어린이의 석관 위에 다시 살아난 라자로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 한 손에는 복음서를 다른 손에는 철학자들이 들고 다니는 여행용 지팡이를 지니신 참된 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죽음을 이기십니다. 복음은 방랑하는 철학자들이 찾지 못했던 진리를 가져다 줍니다. 당시 석관 예술의 일반적인 형태로 오래 지속된 이러한 모습에서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정말 누구인지, 그리고 참된 인간이 되고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이길은 진리입니다.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이시며, 따라서 우리 모두 찾고 있는 생명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길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인생의 참스승입니다. 목자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자의 모습도 기존의 로마 예술에 등장하는 예들과 일치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에서 목자는 일반적으로 대도시의 혼란 중에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평온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모습이 좀 더 깊은 내용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22], 1, 4). 참된 목자께서는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길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 목자께서는 아무도 같이 갈 수 없는 완전한 고독의 길에서도 저를 이끌며 함께하십니다. 목자께서 몸소 이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목자께서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시어 죽음을 이기셨으며,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하면 나아갈 길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려고 돌아오셨습니다. 죽음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주어….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시편 23[22], 4 참조)라는 자각은 신자들의 삶에 나타난 새로운 ‘희망’입니다.

7. 다시 한 번 신약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우리는 믿음의 덕을 희망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일종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이후 이 구절의 핵심 단어에 관하여 성서 해석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 해석의 길이 다시 열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핵심 단어를 번역하지 않으면 이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히포스타시스(ὑπόστᾰσις) 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에게 그리스 어 히포스타시스를 라틴어 슙스탄티아(substantia, 실체)로 번역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시대에 이루어진 이 구절의 라틴 어 번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Est autem fides speranda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apparentium”(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사정의 실체이며 드러나지 않는 것들의 증명입니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자신이 속한 철학 학파의 용어를 사용하여 ‘믿음은 정신 자세(habius mentis)이며, 이로써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오성이 보이지 않는 것에 동의하게끔 이끄는 영혼의 자세’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4) 그래서 ‘숩스탄티아’(substantia)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다듬어 졌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온전하고 참도니 생명이 최초의 상태로, 말하자면 ‘싹으로,’ 따라서 ‘실체’(substantia)에 따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올 것의 현존도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이 ‘앞으로 올 것’이 아직은 외부 세계에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나타나지’ 않지만) 초기의 역동적 실재로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이미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특별히 공감하지 않았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신앙관에 비추어 ‘실체’의 개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히포스타시스/숩스탄티아의 개념을(우리 안에 있는 실제로서의)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내적 태도의 표현으로서 주관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루터는 증명(argumentum)이라는 단어도 주관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가톨릭의 성서 해석학에도 지배적이었습니다. 주교들이 인준한 독일어 공동 번역 신약에도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에 굳건히 서고,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Glaube aber ist: Feststehen in dem, was man erhofft, Überzeugtsein von dem, was man nicht sieht ). 이것이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만 본문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 어 엘렝코스(elenchos) 는 주관적 의미의 ‘확신’이 아니라 객관적 의미의 ‘증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개신교의 성서 해석학에서도 제대로 된 다른 해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 개신교의 해석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5) 믿음은 단순히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개인적인 지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줍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에도 우리가 바라는 실제적인 어떤 것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실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의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미래를 현재로 이끕니다. 미래가 더 이상 단순한 ‘아직 아니’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현재를 바꿉니다. 미래의 실재가 현재와 접촉하여 미래의 것들이 현재에 있는 것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현재 있는 것들이 미래의 것들에 쏟아져 들어갑니다.

8. 희망에 찬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과 어휘나 내용 면에서 관련된 히브리서 10장 3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설명들이 더 힘을 얻고 일상생활과 연관을 맺게 됩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박해를 겪은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의(hyparchonton—Vg. bonorum)침탈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hyparxin—Vg. substantiam)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파르콘타(υπάρχοντα)는 지상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 되는 재산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 되는 재산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바탕이요 ‘기초’(substantia)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동안 통상적으로 삶을 보장하는 이 ‘기초’를 빼앗겼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굳건히 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기초를 중요하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존에 더 좋은, 길이 남고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토대’(fundamentum)를 발견하였기에 이를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기초’(substantia)의 두 가지 유형, 곧 생계 수단 또는 물질적 ‘토대’(fundamentum)와, ‘바탕’(fulcrum)이요 지속적인 ‘기초’(substantia)인 신앙의 표현 간의 연관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디디고 설 수 있는 새로운 바탕을 마련해 줍니다. 이로써 물질적 소득에 의존하는 일상적 토대에 맞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일상적 토대는 단지 뒷받침이 되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토대의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이 새로운 자유, 곧 우리가 받은 새로운 ‘기초’에 대한 인식은 이데올로기와 그 정치 기구의 횡포에 저항하여 죽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순교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육신과 영혼이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하여 고대 수도승들부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수도회와 수도 운동에 가입하거나 참여한 이들도 보여 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저버린 포기의 위대한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 새로운 ‘기초’는 참다운 ‘기초’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난 이러한 사람들의 희망에서부터 어둠속에서 희망없이 사는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 솟아났습니다. 이들의 경우 이 새로운 생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마련해 주는 참된 ‘기초’를 보유하고 있고 ‘기초’ 자체가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생각해보면 이분들의 행적과 삶은 사실상 우리에게 앞으로 다가올 것, 곧 그리스도의 약속이 우리가 기다리는 실재일 뿐 아니라 실제적 현존의 ‘확증’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생명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철학자’요 ‘목자’이십니다.

9. 히포스타시스와 히파르콘타라는 기초의 두 가지 유형, 그리고 삶에 대한 두 가지 표현 방식을 지닌 이 용어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이 있는 히브리서 10장에 나온 히포모네(hypomone, 인내;10,36)와 히포스톨레(hypostole, 물러섬; 10,39)라는 두 단어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포모네는 일반적으로 ‘인내’, 곧 끈기와 지조로 번역됩니다. 신자들은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10,35) 고난을 끈기 있게 견디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유다교의 종교적 맥락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특유의 기다림과,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상에서 계약의 확실성에 바탕을 둔 하느님에 대한 꾸준한 충실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체험한 희망, 희망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기다림,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올 것의 ‘실체’(substantia)를 이미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기대가 새로운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이미 주어진 현재의 관점에서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과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히포스톨레라는 단어는 위험할 수도 있는 진리를 공개적이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부족하여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숨으면 “멸망”(히브 10,39)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라는 말슴은 그리스도인들의 근본 자세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10. 지금까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의 신앙과 희망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거만 언급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 전체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이었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도 연관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지탱해 주는 희망입니까? 우리에게 희망이 ‘실천적’인 것,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빚어내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느새 더욱 최신의 정보로 대체된 ‘정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갓난아이를 신자 공동체에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는 세례 예식 문답의 고전적 형식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사제는 가장 먼저 부모에게 아기의 세례명을 무엇으로 지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이어갑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부모는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질문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화에 따르면 부모는 아기가 신앙에 다가가고, 신자들과 친교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쇠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세례를 받는 것,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뜻하는 바입니다. 세례는 공동체 안에 사회화하는 행위나 단순히 교회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세례 받는 아기를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부모는 교회와 성사라는 지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신앙이 아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기대합니다. 신앙은 희망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랍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단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전망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신앙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은 현재의 삶에 일종의 장애물처럼 여겨집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은총이라기 보다는 저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죽음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끝없이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루하고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죽은 아우 사티루스를 위한 추도사에서 바로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죽음은 본성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죽음을 마련하시지 않고 치유제로 주셨습니다. …. 죄 때문에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노고와 참기 힘든 탄식으로 비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삶이 잃어버린 것을 죽음이 되찾게끔 하여 이러한 악을 끊어버려야 하였습니다. 은총의 도움이 없었다면 영생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6)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미 이에 앞서 ”그래서 죽음에 대하여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7) 라고 말하였습니다.

11. 암브로시오 성인이 이러한 말을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와 관계없이, 죽음을 없애거나 어느 정도 지연시킨다면 지구와 인류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개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에는 우리 존재 자체에 있는 내적 모순을 보여 주는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끝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고, 지구 역시 이러한 전망으로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순적 태도는 더 심오한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생명’은 무엇인가? ‘영원’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생명’이다, 참다운 생명은 이래야 한다는 것이 갑자기 분명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 언어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참다운 ‘생명’이 전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로마의 부유한 과부이며 아들 셋이 집정관을 지낸 프로바에게 보낸 기도에 관한 장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곧, 궁극적으로 우리는 오직 한 가지 “복된 삶”을 원합니다. 삶 자체, “행복” 자체를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기도하여 바랄 것은 달리 없습니다. 우리의 여정에 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오직 이것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혀 모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빠져나가 버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로마서를 인용하여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 8,26)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가운데에도 우리는 이것이 분명히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른바 유식한 무지(docta ignorantia)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무엇을 바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참생명’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모르지만 이끌리는 무엇 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8)

12. 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모든 모순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본질적 상황을 이러한 매우 정확하고 언제나 타당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죽음도 건드릴 수 없는 참된 생명을 원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우리가 이끌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험하거나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알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이끌리는 참다운 ‘희망’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긍정적인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참된 세상과 참된 인간을 지향하는 모든 노력과 좌절의 원인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이처럼 모르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이는 혼란을 일으키는 만족스럽지 못한 단어입니다. 사실 ‘영원’은 끝이 없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생명, 잃고 싶지 않은 생명m,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은 여가보다는 피로를 더 가져다주기에 한편으로는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한시성을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고, 영원성이란 달력의 날짜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이 우리를 감싸고 우리가 전체성을 얼싸 안는 충만한 절정의 순간으로 느끼도록 노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순간은 마치 이전과 이후가 없는, 무한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러한 순간이 온전한 의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단순한 기쁨에 넘쳐 드넓은 존재 안으로 새로이 잠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우리가 그리스도교 희망의 목적을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알고 싶으면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야 합니다.9)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

13.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하는 앎을 대표적인 형상으로 표현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정의 방식으로, 곧 무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희망을 표현하련느 이 모든 시도들은 수 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신앙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하여 삶을 위한 물질적 기초인 히파르콘타(hyparchonta, 재산)를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11장에서 아벨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희망안에서 산 사람들의 일생과 여정에 관한 일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희망은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강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비참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배타적이고 개인적인 영원한 구원에서 피난처를 마련하는 방법인 순전히 개인주의라고 무시당하게 된 것입니다. 앙리 드 뤼박은 그의 독창적인 저서 ‘가톨리시즘, 교의의 사회적 측면’(Catholicisme. Aspects sociaux du dogme)의 서론에서 이러한 관점에 관하여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몇 가지 특별한 표현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내가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내 기쁨입니다. 이는 무척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지금 그리고 언제나…..그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 그리고 언제나…..그는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입니다. 이러한 기쁨의 고독이 그에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선택된 사람입니다! 축복 속에서 그는 손에 장미를 들로 전쟁터를 뚫고 지나갑니다.”10)

14. 이와는 달리, 드 뤼박은 해박한 교부학적 바탕위에서 구원을 사회적 실재로 보아야 하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히브리서는 “도성”(11,10,16; 12,22; 13,14 참조)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공동체적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관점ㅂ에 따라 교부들은 죄를 인류 일치의 파괴, 곧 붕괴와 분열이라고 보았습니다. 언어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난 곳인 바벨은 죄가 근본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구원’은 신자들의 세계 공동체 안에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일치 안에 우리가 다시 모이는 일치의 재건입니다. 희망의 사회적 특성을 보여 주는 모든 문헌을 여기에서 검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실재를 조금이라도 깨우쳐 주고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 집중해 보기로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단순히 ‘복된 삶’이라는 표현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시편 144[143]편 15절의 “행복하여라, 이렇게 되는 백성!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사람들에 속하고…..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러한 지시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1티모, 1,5)”11)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도달하려고 늘 애쓰는 이 참된 삶은 ‘백성들’과 실존적으로 일치하는 데 달려 있으며, 이 삶은 ‘우리’안에서 각자에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가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보편적 자아에 열려야만 우리의 시선이 기쁨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 ‘복된 삶’에 대한 이러한 공동체 지향적인 관점은 분명히 현세를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이지만,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라 주어지거나 배제된 가능성에 따라서 현세를 건설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대에 새로운 민족들의 침략은 법적 질서가 자리 잡힌 사회에서 권리와 생명을 어느정도 보장해 주던 세상의 단결을 위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단결이란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공동체의 삶과 평화를 지탱해 주는 토대를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는 어느 정도 무작위로 선택한 중세의 한 시점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흔히 수도원은 개인 구원을 위한 세상으로부터 도피처(contemptus mundi, 세상을 업신여김)로 인식되었습니다. 자신의 개혁 수도회에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에 관하여 전혀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수도승들은 전체 교회와 세상을 위한 책무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전체 지체, 아니 모든 인류를 위한 수도승들의 책임을 드러내고자 여러 가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승들에게 가짜 루피누스(pseudo-Rufinus)라는 단어를 적용하였습니다. “인류는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12) 그는 관상하는 사람들(contemplantes)은 농사꾼(laborantes)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서 물려받은 노동의 고귀함은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 규칙에 나와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러한 생각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수도원에 몰려드는 젊은 귀족들은 육체노동을 해야 하였습니다. 사실 베르나르 성인은 수도원조차도 낙원을 재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이고 영적으로 ‘땅을 일구는’ 장소로서 새로운 낙원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숲 속 거친 땅이 기름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만의 나무들이 쓰러졌습니다. 영혼 안에 자라는 모든 잡초들이 뽑혔고 육신과 영혼을 위한 빵이 넘쳐나는 땅이 마련되었습니다. 13) 우리는 현대사를 마주하여 영혼의 잡초가 무성한 곳에서는 세상의 참된 구조도 꽃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

16. 예수님의 메시지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오로지 각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발절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전체에 대한 책임 회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을 찾는 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추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이에 대답하려면 근대의 기틀이 된 요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요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이러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 신기술 발명을 통하여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시대의 밑바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 자연법과 동등하다고 해석하게 하여 마침내 ‘자연에 대한 기술의 승리'(victoria cursus artis super naturam)14)를 이루게 된 실험과 방법의 새로운 상호 관계입니다. 베이컨의 전망에 따르면, 그 새로움은 과학과 실천의 새로운 상호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적용됩니다. 과학과 실천의 이 새로운 상호관계는, 하느님께서 주셨으나 원죄로 잃어버린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재구축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5)

17. 이러한 주장을 주의 깊게 성찰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낙원에서 쫓겨나며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구원’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제, 이 ‘구원’, 곧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새롭게 발견된 과학과 실천의 결합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단순히 부인되었다기보다는 오로지 개인과 다른 세상에 관련된 차원의 문제가 되고, 또 어느 모로 이 세상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관점은 근대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오늘날에 와서도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희망의 위기인 신앙의 위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베이컨을 통하여, 희망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제 그것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불립니다. 베이컨에게 그 당시 이루어진 여러 발견과 발명은 분명히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학과 실천의 상호 작용으로 완전히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 곧 인간의 나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16) 베이컨은 비행기와 잠수함을 포함한 앞으로 나올 발명까지도 그려보았습니다.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발전될수록, 눈에 보이는 인간 잠재력의 향상에 대한 기쁨으로 ‘진보에 대한 믿음’도 계속 확고해졌습니다.

18. 또한 이성과 자유라는 두 범주가 점차 진보 개념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진보는 무엇보다도 이성의 지배가 확대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리고 이 이성은 분명히 선의 힘, 선을 위한힘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진보는 모든 종속을 극복하고 완전한 자유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는 인간의 온전한 자아실현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와 이성이라는 두 개념에는 정치적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인류의 새로운 여건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꿈꿉니다. 그러나 이성과 자유가 지배하는 그러한 나라의 정치적 여건들은 언뜻 보면 확연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성과 자유는 그 본질적인 선익에 힘입어 그 자체로 새롭고 완벽한 인간 공동체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자유’라는 두 핵심 개념은 암암리에 그 시대의 국가 질서의 속박뿐만 아니라, 신앙과 교회의 속박과도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념은 엄청난 폭발력이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9. 이 희망의 정치적 구현을 위한 두 주요 단계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희망의 증진과 그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그리고 이를 꾸준히 지키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단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성과 자유의 지배를 하나의 정치적 실재로 확립하려고 시도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은 처음에는 이 사건을 매력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이성과 자유에 관하여 새롭게 성찰해야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이 두 단계는 당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담은 임마누엘 칸트의 두 글에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1792년 그는 ‘악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의 승리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Der Sieg des guten Prinzips über das böse und die Gründung eines Reiches Gottes auf Erden )을 썼습니다. 이글에서 그는 “교회적 신앙에서 순수한 종교적 신앙만의 지배로 점차 옮아갈 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17)라고 말합니다. 또한 혁명이 교회적 신앙에서 이성적 신앙으로의 이 이행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른바 ‘서두르는 기다림'(exspectatio subita)이 새롭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이성적 신앙인 ‘종교적 신앙’이 ‘교회적 신앙’을 극복하는 바로 그 곳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1794년 ‘만물의 끝'(Das Ende aller Dinge)의 본문에는 변형된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제 칸트는 만물의 자연스러운 끝뿐만 아니라 반자연적인 곧 전도된 끝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어느 날 사랑에 합당치 않게 될 때…..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거부와 반대의 마음이 팽배할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일지라도(아마도 두려움과 이기심에 바탕을 둔)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세계 종교가 되도록 예정되었으면서도 실제로 그러한 운명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측면에서 만물의 (전도된) 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18)

20. 19세기에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류의 새로운 형태의 희망으로 굳건히 지속되었고, 이성과 자유는 계속해서 희망의 길을 밝히는 길잡이 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점점 신속해지는 기술 발전과 이와 연관된 산업화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 상황이 생겨나게 됩니다. 산업 노동자 계급과 이른바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184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묘사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어서는 안되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조 전체를 뒤흔들고 전복시킬 것입니다. 1789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후 이제 새로운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진보는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혁명적인 도약이 필요하였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탁월한 언어와 지식으로, 칸트가 ‘하느님 나라’라고 한 구원을 향한 역사상의 이 중대하고 새로운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결정적인 전진을 시작하고자 하였습니다. 내세의 진리를 부인하고 나자 현세의 진리를 세우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대한 비판은 땅에 대한 비판이 되고,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이 되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궁극적으로 선한 세상을 향한 진보는 더 이상 단순히 과학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치는 과학적으로 사유된 것인데, 역사와 사회의 구조를 인정할 줄도 알고 모든 것을 바꾸는 혁명을 향한 길도 제시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비록 한편으로 치우치기는 했지만 자기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였고 혁명을 향한 길을 매우 분석적으로 명쾌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론에 그치지 않고 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 탄생한 공산당을 통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의 약속은 예리한 분석 덕분에 또 급진적 변화를 위한 명확한 수단 제시 덕분에,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매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21. 그러나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오류도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법은 명확히 제시 하였으나, 이에 뒤따르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배 계급의 타파, 정권의 몰락,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통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이 실현된다고 가정하였습니다. 실제로 모든 모순이 척결되면 인간과 세상은 마침내 안정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를 위하여 최선의 것을 바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스스로 올바른 길을 따라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혁명을 달성한 다음, 레닌은 스승의 저서에는 그다음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하여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소멸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과도기’에 대하여 모두 잘 알고 있고 이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한 세상으로 이끌어가기는 커녕 비참한 파괴만 남겼습니다. 물론 실제로 불필요하게 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이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질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침묵은 그가 선택한 접근 방법에 따른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의 오류는 더 깊은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망각하고 인간의 자유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유가 언제든 악을 위한 자유도 된다는 점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경제만 바로잡으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결정적 오류는 유물론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단지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바람직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통하여 외부적으로만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22. 우리는 다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정신 그리고 희망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과 나누는 대화에는 현 시대의 자기 비평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 대화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참으로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현 시대의 이러한 자기 비평에 합류하여 현대 그리스도교도 스스로를 비평해 봄으로써 자신의 근원부터 시작하여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몇 가지 간략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진보’란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보가 약속하는 것은 무엇이고 약속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19세기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세기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지닌 문제점을 매우 과감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진보가 자세히 살펴보면 투석기에서 원자 폭탄으로의 진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이것은 가려서는 안되는 진보의 한 측면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보는 분명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는 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전례 없는 가능성인 악을 위한 무시무시한 가능성도 열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보가 잘못 인도되면 어떻게 끔찍한 악의 진보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목격하였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윤리 교육, 인간의 내적 성숙(에페 3,14; 2코린 4,16 참조)을 통한 진보와 상응하지 않는 다면, 이는 결코 진보가 아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위협일 따름입니다.

23. ‘이성’과 ‘자유’라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된 몇가지 물음만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이고,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가 그리스도인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 이성이 참다운 승리를 거둡니까? 이성이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이성이 하느님에 대해 눈멀게 됩니까? 지배 이성과 행위 이성이 이성의 전부입니까? 진보가 참다운 진보가 되려면 인간의 도덕적 성숙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 이성과 행위 이성에서도 이성이 신앙의 구원하는 힘과 선악의 분별을 받아들여 반드시 보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만 참다운 인간 이성이 가능합니다. 이성은 의지에게 바른길을 알려 줄 수 있을 때에만 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는 이성이 자신을 넘어서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질적 역량과 정신의 분별력 부족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간 조건은 인간 자신과 피조물에게 위협이 됩니다. 따라서 자유에 관하여 논의할 때에 인간의 자유는 언제나 여러 자유들의 조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유의 바탕과 목표인 이러한 조화는 공통되고 본질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희망 없이 살게 됩니다. 현대의 발전들을 볼 때, 이 회칙의 시작 부분에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페 2,12)은 매우 현실적이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없이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 그 인간만의 나라는 결국 칸트가 설명한대로 분명히 모든 것이 ‘전도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목격하였고 늘 새롭게 목격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말씀하실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사에 들어오신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이 완전해지려면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성과 신앙은 그 참된 본질과 사명을 성취하고자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참모습

24. 이제 다시 한 번 질문해 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희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점증적 진보는 물질 영역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영역에서는 물질 구조에 대한 지식 증대와 더 앞서가는 발명에 따라 자연에 대한 더 큰 지배를 향한 진보가 분명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늘 새로운 것이기에 인간은 언제나 새롭게 판단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윤리 의식과 윤리적 판단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점증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단순히 다른이들이 우리 대신 미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는 모든 사람, 모든 세대가 근본적인 판단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전 인류의 도덕적 보화를 활용할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결코 물질적 발명과 같은 방식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도덕적 보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호소와 자유를 위한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 인간사의 올바른 상태, 세상의 도덕적 안녕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단순히 체계만으로는 결코 보장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체계들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인간의 자유를 몰아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공동체가 최상의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공동체 질서를 자유롭게 따르도록 할 수 있는 신념이 그 공동체안에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그 체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신념을 요구합니다. 신념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를 통하여 새롭게 획득하는 것입니다.

나) 인간은 언제나 자유롭고 또한 인간의 자유는 언제나 약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선의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사람은 누구든 거짓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선을 위해서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는 결코 저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결정적인 선의 조건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부인될 것이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는 결코 좋은 체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5.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사의 바른 질서를 추구하는 이 힘든 일에 언제나 새롭게 뛰어드는 것은 모든 세대에 맡겨진 임무라는 것입니다. 이 임무는 간단히 끝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모든 세대는 설득력 있는 자유와 선의 체계를 세우는 데 직접 기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와 선의 체계는 인간 자유의 올바른 행사를 위한 지침으로서 다음 세대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따라서 언제나 인간의 한계 속이기는 하지만, 미래를 위한 어떤 약속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체재는 도움을 주지만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