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그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구세주 탄생을 알린 천사들은 말합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주님은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자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와 문이 닫혀 있었던 방 안에 나타나셨을 때 놀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주님은 모두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두에게 언제나 이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파견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마태 10,16). 이리떼 속에 보내진 양들은 찢겨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겁낼만합니다. 그래서 유다의 줄기에서 나온 사자로 구약성서가 예언한 바로 그 주님이 스스로 어린 양이 되시고, 어린 양으로서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 가셔서 찢겨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인류 역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최후의 참된 권능을 보여 주십니다. 이리떼들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참된 지배자는 희생양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사랑이 파괴의 힘보다 더 강함이 드러나고,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심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 양떼들이여, 이리떼 가운데 있을 지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처럼 되고 당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양들도 또한 찢겨 죽임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그를 따라 마침내 순교할 각오, 상처받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상처받을 각오 없이는 신앙도 없습니다.
여러분 양떼들이여, 이리떼 가운데 있을 지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분 활동의 모든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처럼 이스라엘에서 쫓겨나 이방인들의 도시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초기 300년 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초기의 300년만이 순교의 시대는 아닙니다. 이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위대한 이성과 문명의 시대라는 20세기도 다른 세기보다 더 많은 순교자를 낸 고통과 파괴의 시대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리떼들에게 동조하지 않아서 찢겨 죽임을 당한 이들이 바로 하느님과 인류의 참된 호교론자라는 것을, 이들이 교회와 세상을 믿을 가치로 만들었음을 또한 우리는 압니다. 진리와 사랑은 영원하고 신앙 때문에 가해지는 고통은 생명을 선사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사랑을 위해 기꺼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역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자유를 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리떼들은 우리시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세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끔찍한 고문 기구들을 살펴보면 그런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고문 수단, 덜 잔인할 것도 없는 고문 수단들이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의 힘은 사람들을 조롱거리로 만들 수도 있고 찢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입을 막는데 쓰이는 새로운 고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교회 역시 세상인지라 이리떼와 양의 미묘한 양상은 교회 중심부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이리떼가 있고 우리 모두는 우리들 안에 있는 이리떼의 속성에 물들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복음 근본주의자들의 칼날이 이미 도처에 있어서 그것이 누군가에게 내리쳐질 때 그 사람은 두려워 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복음의 말씀에 제대로 귀 기울인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두려움도 여기서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틀림없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또 그럴 때 두려워 합니다. 주님도 올리브 동산의 그 밤에 우리의 모든 두려움, 우리의 모든 불안을 몸소 겪으시고 받아들이셨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려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종류의 독재가 가진 유일한 힘입니다. 그것이 타도되는 곳에서만이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순전히 인간적인 무서움에 떨며 불안해 할 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은 사랑을 잃었을 때 결정적인 두려움이 됩니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감히 무릎쓰는 것,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지니고 있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너무나 귀중하고, 사랑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난과 외로움과 불명예를 두려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은 더 위에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선을 위해서 재산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철학적이고 추상적입니다. 머리로 하는 이해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결정적으로 옹호하고 그것을 위해 상처받고 매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선한 사람입니다. 선은 한 분의 얼굴만을 가집니다. 선한 분, 바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하느님을 보여 주십니다. 그 하느님은 참새까지도 마음 써 걱정해 주시며, 우리 삶의 사소한 일들도 그분께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마태 10,30).
선인이란 착한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은 인간적인 얼굴과 인간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선은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이름을 가집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과의 친교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고 지탱시키며 어떤 것보다 귀중하고 유일한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말합니다. “당신만 계셔 주시면 나는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나이다” (시편 73,25).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 사랑과 당신 은총을 내게 내리소서.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여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나이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우정을 잃게 되면 우리의 영혼과 우리 자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 우정이 머무는 한, 다른 모든 박해와 상실과 파괴가 아무리 크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분이 우리의 친구로 계시는 한, 우리가 그분 곁에 있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확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썩어 결국 죽게 되지만, 영혼을 파괴하지는 말아라.” 그리고 베드로 성인은 그의 첫 번째 서간 서두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1베드 1,9 참조), 이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영혼이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행하고 말했던 것에 대해 주님이 심판하실 것을 생각하라.” 결국 내일 아침 신문에 나에 관해 어떤 말을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분이 심판의 순간에 나에게 그리고 나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두려움은 힘을 잃고 그러면 우리는 유일한 것과 참된 것을 위해 자유로워집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세계 도처에는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많은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있고, 그들이 교회에 생명력을 주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을 자세히 살펴볼 때 교회 안에도 역시 많은 인간적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교회의 약점이고 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살펴볼 때 우리는 더욱 그것을 잘 파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친교,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명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그렇게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한 신학자는 그 문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너무 크시고 우리는 너무 작아서 우리는 그분을 전혀 모욕할 수가 없다” 라고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우정에 대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든 것을 허용하고 이해하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낭만적인 몽상가로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생각은 우리가 영혼을 잊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비록 진지하게 받아들였어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책망할까 두려워, 우리는 감히 더 이상 심판과 내세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두려움의 지배가 힘을 잃고 맙니다. 교회가 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빛이 촛대 위해서 밝게 빛나지 않고 자주 사라지기 때문에 교회가 병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 말씀 속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구별하고, 유일하고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도록,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잃지않는 한 그리고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한 다른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다시 배우게 될 때 교회는 다시 빛을 되찾고 산 위의 도시가 될 것이며, 많은 영혼들에게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확신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2002년 6월 22일 독일 풀다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요셉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16세 성하)께서 하신 강론
– 마리아 1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