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폴란드를 방문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강론주제로 십계명과 사랑의 계명을 선택하셨는데 폴란드의 아주 박식한 사람들이 “왜 하필 사랑 을 이야기 하면서 죄를 강조하며 인식시키는가?”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 있음을 인식시키는 것과 죄를 단죄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원죄를 비롯하여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일은 구원의 첫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느님 앞에서 이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죄는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저렇게 하고, 사목회장님도 구역장님도 저렇게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타협해버리면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하면 아주 합리주의적인 단정한 신자는 될 수 있다.
어른들과 아이들 고해성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이들이 고해성사 볼 때는 핑계가 없다. “엄마 아빠 말 안 들었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고해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어머니가 이러저러 해서 미워했습니다. 남편이 이러저러 해서 미워했습니다.” 이것은 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나 남편의 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미사 때는 내 탓이요 하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정작 고해실에서는 절대로 내 탓이 아니다. 고해실은 죄를 용서받는 곳인데 오히려 죄를 더 짓고 오는 곳이 되었다.
타협과 양보로 일관하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달짝지근한 것은 사람을 부패하게 한다. 안락에 취하면 변화를 거부한다. 편안함을 거슬러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너무 열심인 사람도 용납할 수 없고 너무 나태한 냉담자도 용납 할 수 없다. 적당히 사는 신자가 최고로 좋고 내 마음에 평화를 준다. 깨달음만을 강조 하는 사람들, 죄와의 투쟁 없는 ”관상생활”이 판을 친다.
신앙생활, 즉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쟁이다. 복음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미 백기를 들어버린 이 세상에서 십계명이나 복음의 진리를 적당한 선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잘 접목시켜주는 사람일수록 뛰어난 영성가로 알려지는 세상 에서, “아닌 것을 아니야.” “옳은 것을 옳다.” 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지금은 영적인 박해시대다. 옛날에는 배교하고 나서 반성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신앙의 근본을 변질시켜놓고도 칭송 받으려고 까지 한다. 그래서 옛날보다 지금은 더 참혹한 박해의 시대이다. 열심한 신자는 많은데 겸손한 신자는 적고, 거룩하고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도 줄어든다.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요청하신다. 의지가 굳건하고 모든 일을 잘하는 완벽한 사람이 승리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약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완벽하게 승리하는데 비결은 순수한 열정과 온전한 의탁이다. 약점이 드러날수록 “그래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어.” 하며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시 무릎을 꿇고, “주님! 도와주십시오.” 애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저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 약점은 장점이 된다. 하느님의 섭리를 더 많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체성사의 그 위대한 능력은 발휘된다. 믿음도 없이 변명과 타협으로 투쟁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는 내몸이다. 내 피다.” 해도 우리 모두 알아들을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힘으로 산다. 이것 하나를 받아들이면 모둔 것을 이룰 수 있다. 여기에서 희생의 힘, 사랑의 힘, 인내의 힘등 온갖 힘이 나온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작고 순수한 이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