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덕에의 부르심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롬바르디 신부는 “사랑의 십자군”에 대해 강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성도들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제각각 외따로 살 것이 아니라 들판의 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를 통해 성인들의 축일을 기리고 그들의 이름을 받으며 그들에게 교회를 봉헌합니다. 우리는 성인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성인이 될 것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들은 성덕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성인이란 교회 안에 서 있는 창백한 석고상이나 수도승 같은 이상한 모습의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성인을 한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며, 성인이라 기껏해야 위선자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자신은 결코 교회가 인정하는 위대한 성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확언합니다. 즉 현실적인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함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권고

   바울로는 그의 신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필립 1,1) 또는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온 교회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들”(2고린 1,1),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로마의 교우 여러분에게” (로마 1,7)와 같이 인사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와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성스럽게 하셨기 때문에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1고린 1,2)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성스럽게 하십니다(에페 5,26 참조). 바울로 사도가 오늘날 이곳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는 ” ㅇㅇ의 성도들” 앞으로 주소를 쓸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 … 앞으로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 이 경고를 거역하는 사람은 …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1데살 4,1-8).

위대한 성인의 가치

   모든 사람들은 거룩해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거룩함이란 각자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까요? 우리는 스스로 교회가 인정한 위대한 성인을 지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보물이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철학은 경이에서 시작된다.” 라고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경이로움이 바로 성덕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 받는 존재로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사랑을 다시 되돌려주고 널리 전파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어, 완전히 사랑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얼마나 의지가 강한가’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이 강한가’라는 것이 성인을 만듭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병자 앞에서 구토를 느꼈을 때, 그 환자를 씻긴 물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의학적으로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였습니다. 나병환자 앞에서 구토를 느꼈으나 그 환자에게 입을 맞추어준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런 점에서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성인이란 위대한 사랑의 실천가로서 사랑으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 속에서 그들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내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환히 빛나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안나 샤퍼는 수십 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교훈과 기적을 보여주셨고 마침내 고통을 통해 그녀를 구원하셨습니다. 돈 보스코, 마리아 바르트, 데레사 게하르딩거 같이 청소년들을 돌보고 교육시킨 성인들에게서는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천주의 성 요한 같이 병자를 돌보는 성인들을 통해서는 병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빈센트 폰 바오로를 통해서는 노예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아르스의 사제 요한 비안네, 파두아의 레오폴드 만디, 비오 신부같은 성인들은 죄를 사하는 고해성사의 필요성과 죄인을 해방시키는 그 능력을 증명합니다. 모든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삽니다. 또한 가난한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인을 만듭니다.
   “어떠한 신분이나 계층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으로 부름을 받는다. 인간은 모두가 성덕의 소명을 받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13항)
   거룩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믿음 가운데 살며 그 믿음이 그 사람의 참됨을 증명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순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함은 일반적으로 동시대 사람들보다는 그가 죽은 다음 후세 사람들에게 먼저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성인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 예수님과 성인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그 말씀에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말씀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따르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이러한 저항과 박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백성들이 거부하는 것에 대해 가장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동료 수도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인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응은 예수님과 성인들의 말씀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고 일단 받아들이되, 그것을 가위질해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반응들은 순교자들의 증거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를 그리스도는 생명이며 그리스도께 충실함은 현세의 생명보다 훨씬 높은 것임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증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박해합니다. 예수님께 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듯이 순교자에게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는 성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은 놀랍게도 하나의 의미를 가집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는 그리스도 신자인 알료사가 등장합니다. 수용소 안의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판결에 대해 한탄하는 동안, 알료사는 저녁에 기도를 하거나 성서를 읽습니다. 알료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동료 수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것에 저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알료사의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화를 냈지만 곧 그 말을 인정하고 알료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고, 당신이 무엇을 위해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말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많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 해도 모든 것에는 다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고, 질병이나 고통 같은 불행을 당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것을 구원의 은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기회로 여기고, 죽음은 “주님 곁에 있을” 기회로 여깁니다. 성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큰 어려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그리스도를 지니고 있어서 자신이 겪는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고 그대로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명의 성인

   그러나 위대한 성인들을 깊이 고찰하라는 것은 성급하게 그들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모방은 대부분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법을 가집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별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성인들을 우리의 가장 휼륭한 안내자로 삼을 수 있고, 그들에게서 삶 속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인생의 모든 상황을 그리스도와 함께 견뎌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성인들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믿는 이들의 용기를 꺾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리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개선문이 있는데 그곳에는 무명용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위대한 지휘관과 그들의 전투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전투의 승리에 공헌한 보잘것없는 무명의 군인들도 기억했습니다. 무명의 군인들처럼 익명의 성인들도 있습니다. 다발성 경화증 환자인 자신의 남편을 십 년 동안 사랑으로 보살핀 부인, 미개한 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선교사, 낙태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여인, 큰 인내로서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환자 등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받아들인 이들을 우리가 무명의 성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까지 한 명의 성인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잣대가 너무 높기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거룩함의 샘이신 성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안톤 찌게나오스. 신학교수, 독일 잡지 ‘Der Fels’ 2001.11월호에서
– 마리아  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