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로부터 전해오는 성전을 따라 성교회에서 견진성사와 축성할 때 쓰는 성유는 올리브 기름과 발삼 향액을 섞어서 만든 것인데, 여러가지 상징 외에 주의 몸에서 빛나고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시던 두 가지 중요한 덕행을 표시하고 있다.
주께서 마치 이 두 가지 덕으로 우리 마음이 주께 봉헌되고, 당신의 표양을 따르게 된다고 생각하신 듯이 특히 우리에게 이것을 권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제자가 되시오.>(마태오 11.29)라고.
겸손은 주님께 대한 완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온유함은 남에게 대한 완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향액은 내가 전에 말함같이 다른 액체와 섞을 때 아래로 가라앉아 겸손을 표시하고, 올리브유는 항상 위에 떠서 모든 덕행을 덮고 덕행을 꾸미는 온유함과 친절을 상징한다. 실로 이 덕은 사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어, 성 벨라도도 완전한 애덕은 다만 인내가 클 뿐 아니라 양선하며 친절하다고 말하였다.
“필로테아여, 양선과 겸손으로 된 신비적 향액을 그대 심중에 보존하도록 힘써라. 마귀는 간교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양심을 살피지 않고 다만 이 두 가지 덕행의 외관과 말로써만 희롱케하나 이런 자들은 스스로 양선하고 겸손한 듯이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증거로는 그런 사람들은 과장된 양선과 겸손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남이 거스르고 나쁘게 말하면, 대단한 교만으로 이에 대항한다.
“성 바울로의 영약”이라고 흔히 말하는 예방약을 마시고 있으면 그 약이 진짜라면 독사에게 물려도 상처가 붓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겸손과 양선이 참된 것이라면 무례함을 받았을 때 정신의 아픔과 붓는 것을 예방한다. 그러니까 만일 독설가나 원수들의 비난을 받아 우리가 교만하게 되고 불평을 일으키며 성을 낸다면, 우리의 겸손과 양선이 참된 것이 아니고 거죽 뿐인 가짜라는 것의 증거이다.
저 성조 요셉이 형제들을 에집트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려 보낼 때 “길에서 서로 싸우지 말라”라는 유일한 훈계를 주었다.(창세기 45.24)
필로테아여, 나도 그대에게 같은 말을 하겠다.
이 눈물의 골짜기는 영복소에 이르는 나그네 길이다. 길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우리 형제이며 벗인 사람들과 다정하고 평화롭게 걸어가지 않겠느냐? 나는 그대에게 예외를 두지 않고 똑똑히 말하겠으니,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아무 것에나 결코 골을 내지 말라.
그대 마음의 문을 분노에게 열어주는 어떠한 구실도 받아들이지 말라.
성 야고보는 예외를 두지 않고 분명히 똑바로 말하여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 1.20)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감독할 의무를 가진 자들의 악으로 다스리고 그 과실을 책하기에는 용기를 가지고 하며 이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양선과 평온을 가지고 할 것이다. 성낸 코끼리를 억제하기에는 어린 양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탄알의 세참을 막기에는 털포단에 비길 것이 없다.
이치에 맞는 말일지라도 격분해서 발하는 교훈은 순수한 이성에서 나온 충고에 비해서 효과가 적다. 사람의 영혼은 자연히 이성에 복종하지만 격분은 폭력으로 이를 정복한다. 그러므로 이성과 격분이 혼합되면 이성의 정당한 주권까지도 폭력자와 같이 있는 고로 더럽혀져서 미운 것이 된다.
임금이 평화의 행렬을 거느리고 국내를 순유하면 백성은 이를 영광으로 크게 기뻐하나, 이와 반대로 왕이 무장한 군대를 인솔하는 때는 비록 그 목적이야 안녕, 질서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민은 이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손해를 받는다. 그것은 아무리 엄중히 병졸들에게 군규를 지키게 하여도 반드시 무슨 소동이 나서 양민을 괴롭게 한다.
이처럼 이성이 만사를 지배하여 평화 중에서 처벌하거나 훈계하며 책망할 때는, 아무리 그것이 엄격하고 까다로워도 모든 이가 이를 사랑하고 공경한다.
그러나 분노와 불만을 품은 때는 (성 아오스딩은 이것을 이성이 인솔하는 병정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사랑할 수 없고 도리어 무서워서 자기 마음까지도 그 때문에 짓밟히고 학대를 받는다.
성 아오스딩께서 전에 쁘로후뚜로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를
“비록 정당한 분노라 할지라도 또는 가장 작은 것이라 해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단 들어와 버린 것을 내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작은 새싹같이 들어와 곧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고로”라고.
분노 중에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사도들도 이것을 금하셨지만) 분노는 미움으로 변하여 거의 이것을 물리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골낸 사람으로서 자기 분노의 바르지 못함을 믿는 자 없고, 더욱 천만 가지 그릇된 편견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정당하게 분노하려 하는 것보다 전연 성내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배움이 좋다.
우리의 나쁜 성질과 나약으로 분노의 충동을 느끼거든 이것을 재빠르게 몰아 내쫓는 편이 주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마치 어느 틈으로 뱀이 머리를 쑤셔 넣으면 쉽게 전신이 들어갈 수 있듯이, 분노도 조금만 여유를 주면 곧 그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면 이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필로테아여, 충동을 느끼는 첫 순간에 빨리(그러나 과격하거나 거칠지 않게 오히려) 고요히 그대의 온갖 힘을 다 모아서 저항하라. 마치 국회같은 데서 방청할 때 경험하듯이 “교요하라 잠잠하라”고 고함치는 것이 도리어 묵묵케 하려는 소리보다 회의장의 소란을 더함같이, 과격하게 우리 분노를 억제하려다가 반대로 이전보다 더 마음의 동요를 심하게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도저히 자기를 지배해 갈 수 없게 된다.
위에 말한 고요한 노력을 한 후에는 이미 백발이 된 성 아오스딩이 청년 주교 옥실리오에게 베푼 교훈을 따름이 좋다. 그 말한 바는
“그대는 모름지기 할 바를 하라. 성경 안에 다윗 성왕이 나의 눈은 분노로 동요했노라 하던 그런 경우를 만나거든 너도 같이 그를 본받아 “주여 나를 긍련히 여기소서”하며 기도하고, 주께서 오른 손을 펴사 네 분노를 그치게 하시기를 간구하라”고.
즉 분노로 마음이 소란할 때는 호수 가운데서 폭풍을 만났었던 사도들처럼 하느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주께서 우리 분노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시면 거기에는 평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현재의 분노에 대한 기도는 반드시 고요하게 평화를 잃지 않게 하고 결코 억세고 과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 죄악에 대한 온갖 방법에 공통되는 주의다.
또 그대가 분노를 표면에 나타냈다고 느끼거든 즉시 양선을 실행하여 그 과실을 기워 갚아야 한다. 거짓말을 했으면 곧 그 자리에서 취소하는 것이 상책인 것처럼, 분노도 그 자리에서 이와 반대되는 양선한 행위로써 배상하는 것이 최선의 교정법이다. 격언에도 <새 상처는 고치기 쉽다.>고 말한다.
또 그대는 아무런 분노할 원인이 없는 평화한 때에 양선과 친절을 쌓기 위해서 남과 이야기할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도 될 수 있는 대로 양선함이 좋다.
아가의 소녀는 다만 입술과 혀 끝에만 꿀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혀 밑에 즉 가슴 속에 이를 간직하고 또 꿀만 아니라 젖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남에게 다만 양선한 말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슴 속까지 즉 진정한 마음으로 양선해야 한다. 또 향기로운 꿀의 단맛 즉 알지 못하는 남에게 대한 예모답고 친절한 닷맛 뿐 아니라, 가족과 친우에게 대한 젖의 단맛도 가져야 한다.
대체로 집 밖에서는 천사같고 집 안에서는 마귀같은 사람들의 결핍된 바는 바로 이것이다.
– 신심에 대한 권고, 신심생활입문, 제 8장
– 성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