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과 관련하여 독자들로부터 많은 문의와 상담요청이 답지하였다. 가족 가운데 단월드, 요가, 마음수련 등에 빠져 영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는 신흥영성운동의 희생자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신흥영성운동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히 필요한 것이 「영적식별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이 영락없이 오늘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애절한 통탄으로만 들리는 것은 필자가 과민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 6)
필자는 상처입고 신음하는 양들의 소리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 더 영적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신자들이 제일 혼돈스러워하는 「기체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소위 기체험이라는 것

   실제에 있어서, 한의학, 동양철학, 전통무술(태극권, 택견 등), 침술, 풍수지리 등에서 말하는 기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련문화는 우리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동안 기(氣)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거의 전무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과연 성령과 관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교회에서 우려하는 점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
   한국인의 언어문화 속에서 기(氣)라는 단어는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공기」를 마시고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색」이 나쁘다, 「기」가 빠졌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차다 등 「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기란 1)활동하는 힘 2)숨쉴 때 나오는 기운이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곧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는 생명의 기본 요소가 바로 기이다.
   하지만 「기」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성급한 처사이다. 동서양을 가로질러 「기」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이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기는 불변하는 이(理)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물질현상,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의미한다. 요가가 발달한 인도 쪽에서는 프라나(Prana) 곧 우주에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초심리학에서는 「사이」(PSI)라고 부른다. 최근 미국의 뉴에이지 계열에서는 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영성이 「생명의 핵이며 무한 에너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한편 일본의 사사키 시게미 박사는 기를 다중, 다층 구조로 형성된 「우주 에너지」로 정의한다. 그는 높은 층의 에너지는 작용력이 신비로워 신(神)에 가깝고 낮은 수준에서는 악마처럼 해를 끼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 파동, 영혼 등과 관련되는 천차만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기에 대한 설명이 이토록 다양한 만큼이나 기체험을 매개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이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묶어서 소개할 수 있다.

1)기수련: 기수련은 크게 「몸수련」과 「마음수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몸수련은 「기」를 건강을 위한 수련법으로 삼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기공, 단전호흡, 국선도 수련 등이 속한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기수련을 통해서 우리는 몸 안에서 기의 흐름을 막힘이 없이 원활하게 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의 축적과 활용 또한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굳이 배속시킨다면 요가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마음수련은 몸수련의 연장에서 또는 독립적으로 행해진다. 대부분 건강증진이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몸수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아완성 내지 종교적인 구도행위를 지향하는 기수련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와는 별개의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수련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불교의 선(禪), 명상, 그리고 말 그대로 「마음수련」이라는 이름의 수련을 들 수 있다.
   -기치료: 기치료는 기의 운용(運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기치료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에 막혀있는 기를 소통시켜주는 요법이다. 한국에서는 민간요법을 전수받아 근래에 확산되고 있고, 서구에서는 1975년 미국의 크리거(Dolores Krieger) 교수에 의하여 창안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기체험의 피해사례

   기체험이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분별하게 「기체험」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가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만 해도 다음과 같다.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 미국의 교포 신자들이 「마음수련」에 빠져 집단으로 신앙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경우.
   – 요가에 빠져서 신앙을 잃은 경우.
   – 가톨릭 신자였다가 요가 강사가 되어 신자들을 교회로부터 빼 내가는 경우.

   이를 종합할 때, 독일인 목사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의 초월명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대로 「기체험」에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은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차한, 성경으로 세상보기, 292~293쪽 참조).

   우리는 기(氣)라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기」라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물리현상일 수 있다. 곧 기는 순수한 자연적 에너지 또는 물리적 에너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확인한 바와 같이 소위 「기수련」에 빠진 신자들에게서 심각한 부작용 내지 피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플러스 알파」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러스 알파’ 부작용

   「플러스 알파」란 바로 기치료 또는 기수련의 과정에 개입되는 「제3의 현상」을 말한다. 곧 기를 부리거나 기를 타거나 또는 기를 가장하여 기행세를 하는 제3의 에너지를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제3의 에너지는 성서적인 용어로 「악령」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악령들린 자와 대적하여 몰아냈던 사례가 숱하게 많이 나온다. 악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로서, 사람 안에서 사람을 황폐화하고(마태 12, 43~45) 발작을 일으키고(루가 8, 29),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2데살 2, 9)고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말하는 「플러스 알파」의 계보에는 이 악령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플러스 알파」의 개입 가능성은 기치료나 기수련을 매개해주는 사람에 크게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대체적으로 한국에 유포되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돈벌이 목적으로 상품화 된 것이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영험한 능력」이 상품경쟁력인 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통력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 과정에서 「플러스 알파」가 개입될 개연성은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 「플러스 알파」가 초래하는 결과는 신앙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나고 정서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사도 바울로는 신앙적인 부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뿐만 아니라 성서는 악령이 사람을 「비참하게」(마태 12, 45)하고 「광야」를 헤매게 하면서(루가 8, 29) 사람을 정서적으로 피폐화 시키는 「거짓말의 아비」요 「살인자」(요한 8, 44)라고 폭로한다.
   지면관계로 생략할 수 밖에 없지만 신흥영성(뉴에이지)의 실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금의 진술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난다. 특히 신흥영성에서 가장 비싼 고급상품(500만원 이상)에 속하는 「채널링」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을 빌어 표현하면 「영계의 어떤 영적존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거짓된 영들」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합적 식별

   필자는 이론과 체험 양면으로 「기수련」 및 「기치료」를 대부분 접해봤다. 개인적인 관심에서도 그랬고 연구의 사명감 때문에도 그랬다.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한다면, 필자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氣)를 인정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서의 기,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 그리고 자연철학(동양철학)의 기이론 등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처럼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자연적인 기에도 종류(種類)와 질(質)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의 종류 만해도 기본적으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따라서 열두 가지나 된다. 거기다가 생명의 기운인 생기(生氣)가 있는가 하면 질병의 기운인 사기(邪氣)도 있는 등, 구분하기 나름으로 천차만별인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체험」이라는 것을 하나로 싸잡아서 옳음과 그름, 선함과 악함을 가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부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그 부작용의 양상은 기를 매개하거나 기수련을 전수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답답한 노릇이지만 사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판별하는 수밖에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기(氣)는 기다. 부인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기체험은 기체험이다. 그냥 기체험이다. 기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듯이 이 기체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좋지 않은 기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란 자연과학적인 사기(邪氣)일 수도 있고, 「거짓된 영」의 교묘한 개입일 수도 있다.
   성령은 성령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면 반드시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어있다. 성부를 부인하고, 성자를 배척하는 성령은 이 세상에 없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신자들을 냉담에 빠트리고, 정신질환자가 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성령」은 없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1요한 4, 2~3).
   성서의 입장은 명료하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루가 20, 25 참조). 바꾸어 말해서 기는 기고 성령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결코 기수련이 가톨릭 영성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이 무슨 고리타분한 이원론(二元論)이냐며 반론을 제기할 「가톨릭신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람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애제자 베드로에게 난데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 23)하셨던 예수님은 이원론적 근본주의자였던가? 대화와 일치운동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영의 식별」 요구를 폐기하지 못한다.

   이제까지「영의 식별」을 위한 가톨릭적 관점을 알아봤다. 이제 그 연장선상에서 이른바 「채널링」이라는 것에 대한 영의 식별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용어의 차이가 있을 뿐 신흥영성운동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채널링(channeling) 현상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이 판치는 시대

   요즈음 서점가에는 「채널링」을 소개하는 책들이 즐비하고 있다. 채널링은 말 그대로 TV 채널을 돌리듯이 영적 주파수를 맞추어 원하는 영(靈)들과 교신(交信)을 하는 것을 말한다.
   채널링을 전파하는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영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들에는 크게 두 종류의 영들이 있다.
   첫째, 너무 갑작스런 충격을 받아 횡사 내지 객사하거나, 억울한 일로 감당할 수 없는 한을 품고 죽은 영혼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민간 통설에서는 이들을 귀신이나 원혼이라 부른다. 이들은 윤회(輪回)의 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이탈하여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로서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령제(慰靈祭)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날 잡지물에서 천도제(薦度祭)를 지내준다는 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겪는 질병, 우환, 액운 등이 죽은 조상들의 영혼이 천도하지 못한 악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TV특집물에서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 적어도 몇 백만 원, 많으면 몇 천만 원을 날린 피해자들에 관한 고발이 다뤄진 일도 있다.
   둘째, 소위 깨달은 영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깨달음에 도달하여 장구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영들이다. 부처처럼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한 영들이 바로 이런 영들이다.
   여기서 채널링은 주로 두 번째에 속하는 영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들이 채널링을 권장하는 이유는 채널링을 통하여 깨달은 영들을 만남으로써 그 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깨달은 영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깨달음의 경지를 나누어 받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윤회의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런 채널링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주인」과도 교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인들이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창조된 존재 곧 우주인의 창조물이라고 한다. 채널링은 저런 우주인의 창조 예지를 나누어 받는 탁월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채널링은 대부분 신흥영성운동들의 핵심 프로그램에 속한다. 다소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이 채널링 현상이 그 배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채널링 현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다.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이라는 이름으로 밀법전수적(密法傳受的)인 비교(秘敎)를 실행한다.
   -심령술(心靈術, Spiritism)이라는 이름 하에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대화를 주선한다.
   -영매(靈媒, channeler)라는 사람이 물질세계와 영혼세계를 연결시켜 준다며 인생상담, 영적상담을 중개한다.
   -채널링을 해주겠다며 환각제를 이용하여 황홀경에 빠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채널링과 관련된 이런 현상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과연 귀신은 있는가? 원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또 깨달은 자들이 머무는 영계(靈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들과의 교신이 과연 가능한가?
   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은 이런 물음들 앞에 서게 되면 얼른 답변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며 얼버무리고 만다.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채널링의 정체 – 귀신은 없다

   가톨릭 신앙의 공식적인 답변은 간명하다. 『귀신은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입장은 분명하다. 귀신은 없고, 원혼도 없고, 깨달은 영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영계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천국, 연옥, 지옥 중 어딘가에 배속되어 있다. 만일 죽은 자의 영이 이들 셋 가운데 배속되어 있지 않고 구천(九天)을 헤매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이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배달사고」 또는 「탈주」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전능(全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이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0)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제어권(制御圈) 속에 예속되어 있어야 한다.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 9, 27). 죽는 것과 심판 받는 일에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7, 23)에서도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치러야 할 고통을 벗어나고자 애원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종으로 끝난다. (자세한 것은 월간 「참소중한당신」 2004년 4월호 이철수 신부의 글 「구천을 헤매는 죽은 영혼」에 잘 나와 있다)
   결론을 내려보자. 가톨릭교회는 귀신, 영매(靈媒), 초령((招靈) 그리고 채널링 등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사실은 성서적 개념인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바로 이 악령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악령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알자. 복음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귀신은 없다. 원혼도 없다. 그러므로 채널링은 거짓된 영의 속임수이다. 이에 반대되는 주장은 복음에 대한 훼손이다. 사도 바울로는 준엄하게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2고린 4, 3~4).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