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땅 위에서 기념하는 예식은 천상 예식의 신비로운 참여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6.11.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미사를 일컬어 “지상의 천국” 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땅 위에서 기념하는 예식은 천상 예식의 신비로운 참여이다.”(1996.11.3) 그렇다. 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그 미사의 음악 양식이나 열정적인 설교와는 관계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날림으로 거행되는 미사에서는 “아름다운 면”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미사에는 어떤 참된 진리, 우리의 몸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처럼 중요한 어떤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미사는 지상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처음 드린 미사에서 체험한 것

   그 당시 나는 개신교 목사였다. 나는 미사를 경험하기 위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평복차림으로 밀워키의 한 가톨릭 성당에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그 호기심이 건전하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의 성서를 연구했었고, “예식” “성찬식” “봉헌”에 관한 수많은 가르침을 찾아냈었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한 성서, 다른 무엇보다 내가 사랑했던 성서는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라고 부르는 그 사건 없이는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미사 예식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으므로 직접 가서 보는 학문적 체험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물론 나는 무릎을 꿇지도 않겠고 어떤 종류의 우상 숭배에도 가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숨듯이 성당 안의 맨 끝줄 장궤 의자에 앉았다. 내 앞에는 여러 연령층의 남녀 신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이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과 무릎 굽혀 절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때 종이 울렸다. 사제가 옆문에서 나와 제단으로 갈 때 모두가 일어났다. 나는 망설였지만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복음 중심적인 칼빈주의자로서 “미사는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종교 의식”이라고 배웠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관찰자로 있기로 했다. 나는 내성서를 옆에 펼쳐놓고서 앉아 있었다.

말씀에 흠뻑 젖어들다

   그러나 나는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내 성서를 보지 않았다. 성서는 내 앞에, “미사의 말씀 안에!” 있었다. 첫 번째 말씀은 이사야서였고 두 번째 말씀은 시편이었다. 또 하나는 바오로 서간이었다. 이 말씀들은 나를 압도했다. 나는 모든 것을 중지시키고 싶었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도 될까요? 정말 엄청나군요!”
   그러나 나는 관찰자의 역할을 충실히 지켰다. 나는 사제가 성체 성혈의 성찬 제정과 축성 기도문을 말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것은 나의 몸 … 이것은 나의 피의 잔이니… ” 나는 내 모든 의혹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사제가 흰 성체를 높이 들어올렸을 때 나는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은 참으로 성체 안에 계시나이다!” 라는 기도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말씀은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감격보다도 더 큰 감격이었다. 그리고 그 감격은 신자들이 일제히 “하느님의 어린양 … 하느님의 어린양 … 하느님의 어린양 …”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더욱 커졌다. 사제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 이라고 화답하며 성체를 들어올렸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성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내가 요한 묵시록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22장으로 이루어진 요한 묵시록 속에서 예수님은 스물여덟 번 이상 어린 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 속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하늘의 옥좌 앞에 서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어린 양으로 찬미되고 흠숭받으신다. 거기에 대해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잔치인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룩한 분향

   다음날 나는 다시 미사에 갔다. 그리고 다음 날도 도 그 다음날도 다시 찾아갈 때마다 나는 내 눈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성서에서 더 많이 찾아냈다. 어두운 성당 안에서 천사와 하늘에 계신 성인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묘사한 요한 묵시록만큼 나에게 그 모습을 그렇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를 이 성당 안에서 보고 있었다. 축제의 옷을 입고 있는 사제와 제단과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라고 노래부르며 모여있는 회중을 … 나는 분향 연기를 보았으며 천사들과 성인들의 중재기도를 들었다. 나는 알렐루야를 함께 불렀다. 내 스스로 하느님을 섬기는 미사 전례 안에 점점 더 끌려들어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여전히 맨 끝줄에 성서를 펼쳐놓고 앉았다. 나는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예식에 참여해야 할지, 묵시록 안에서 보여지는 예식을 관찰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미사와 묵시록이 동일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대 교회를 연구하고 싶은 새로운 열정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아침마다 초대 주교들, 교부들이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을 “발견” 했다. 교부들은 전례를 이해하는 열쇠로 묵시록을, 묵시록을 이해하는 열쇠로 전례를 연구했다.
   그러자 그리스도 신자이며 학자였던 내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서의 묵시록이, 내게 가장 수수께끼로 보였던 그 책이 이제는 내 신앙의 본질적인 기초를 다져주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표시하는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인 계약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보였던 미사가 이제는 하느님의 계약을 확증하는 사건으로 보였다. “이것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이 모든 깨달음에 나는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오랫동안 나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왔다. 나는 그 책이 일종의 암호화된 메시지라고 생각했었다. 세상 종말과 천국에서의 전례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메시지라고.
   그러나 나는 2주간 동안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이렇게 부르짖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들어보십시오. 당신들이 지금 있는 곳이 요한 묵시록의 어디쯤인지를 알려주겠습니다. 요한 묵시록 4장 8절을 열어보십시오. 당신들은 바로 지금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내가 빼앗긴 공로

   “바로 지금 하늘나라에!” 교부들은 이 사실이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그 사실을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사와 요한 묵시록 사이의 관계를 “재발견” 한 것은 나의 공로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 공로까지 가져갔음을 알았다. 미사에 관한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하며 나그네들인 우리가 걸어나아가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천상 전례를 미리 맛본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와 참다운 성막의 사제로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주님께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성인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면서 그들의 친교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 나타나시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그분을 기다린다.” (전례 헌장 8항) 그런데 이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말인가? 아니면 미사에 대한 말인가? 아니면 묵시록에 대한 말인가? 이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빨리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원했으나 개종할 때 흔히 빠질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신중히 그리고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개종한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지나친 열정과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 공의회의 엄숙한 가르침이었다. 후에 나는 완고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도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 중의 한 명인 레오나르도 톰슨은 이렇게 썼다. “미사 중에 행해지는 전례의 말씀을 듣고 있음은 묵시록을 읽고 있는 것과 같다. … 미사 전례문은 묵시록과의 일치에 분명한 역할을 한다.”
   바로 미사 전례의 장면들은 이 특별한 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톰슨이 썼듯이 전례의 형식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메시지의 중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미사 전례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환시보다 더욱 중요한 어떤 것”을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림

   묵시록은 틀림없이 오실 “그 누군가” 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책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두 번째 오심” 을 다른다. 이 말은 그리스어의 “빠루지아”(Parousia)를 번역한 것이다. 1995년 밀워키의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 누군가” 란 바로 가톨릭의 사제가 거양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옳았다면, 바로 이런 시선 속에서 하늘과 땅이 상통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이 참으로 그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머리와 가슴에는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희생 제사의 방법, 미사의 성서적 근거, 가톨릭 전통의 연속성과 전례적 예식의 많은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기 전 몇 달 동안 이 의문들에 대해 연구했다. 어떤 점에서 나는 그 의문들 때문에 오늘까지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고발인으로서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지는 않는다. 아버지께 불가능한 어떤 것을 청하는, 예컨데 저 멀리 빛나고 있는 별을 손에 쥐고 싶어서 청하는 한 아들로서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당신께 드리는 미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어 우리를 당신 자녀로 만드시는 일대사건이다. 내 책은 엄밀히 말하면 내가 가톨릭 전통 안에서 발견한 유산에 대한 보고이다. 우리가 상속받은 유산에는 성서 전체와 미사의 영속적인 살아있는 증거, 성인들의 지속적인 가르침과 신학자들의 연구와 묵상기도의 방법, 교황과 주교의 사목적 돌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지상의 하늘나라를 소유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대단히 많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하나의 묵시이다.

봉헌의 역사

   미사에서 내가 가장 당황했던 말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구절이었는데 이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수천 번 이상 노래하고 말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사제가 성체를 떼어 높이 들어올리며 “하느님의 어린 양 …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라고 말하는 모습도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양은 예수님이시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많은 호칭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주님, 하느님, 구세주, 메시아, 왕, 사제, 예언자 그리고 어린 양이시다.
   그런데 이런 호칭들 가운데 마지막 표현은 우리의 시선을 끈다. 이 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주님, 하느님, 메시아, 왕, 사제, 예언자 그리고 어린 양, 이 호칭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것들과는 전혀 다르다. 일곱 번째까지의 호칭은 두말 할 필요없이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 호칭들은 지혜와 권능 그리고 공동체에서의 신분적 위치를 나타낸다.
   그런데 어린 양이라는 호칭은 어떠한가? 이천 년의 역사 속에서 생겨난 ‘어린 양’이 갖는 모든 상징적 의미들을 잠시 지워버리자.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결코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양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호칭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습기까지 하다. 사실 어린 양은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동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양은 별로 강하지도 않고 영리하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않고 생김새가 뛰어나지도 않다. 그보다 더 특이한 다른 동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우리는 예수님을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묵시 5,5)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어떤 동물도 동물의 왕인 사자에게 함부로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묵시록에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는 표현은 그저 몇 번 나올 뿐이다. 그러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스물여덟 번이나 등장하여 매우 압도적이다. ‘어린 양은 통치자로서 하늘나라의 옥좌에 앉아 있다'(묵시 22,3 참조). ‘어린 양은 수천수만의 천사들과 사람들을 인도하고, 죄인들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다'(묵시 6,15-16 참조). 그러나 이처럼 분노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닌 어린 양의 진지한 얼굴 표정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러한 점을 이러한 점을 매우 진지하게 표현하였다. 요한 사도가 쓴 신약성서의 요한 복음서와 묵시록에서 예수님은 오로지 ‘어린 양’ 또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된다. 다른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을 ‘어린 양 같은’ 이라는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사도 8,32-35 ; 1베드 1,19). 그러나 요한 사도만은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요한 1,36 ; 묵시 전체 참조).
   우리는 어린 양의 의미가 미사에서뿐만 아니라 묵시록에서도 핵심적 의미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어린 양이 ‘누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미사를 지상의 하늘나라로 경험하고자 한다면, ‘어린 양’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 양이 ‘어떤 존재’이고 ‘왜’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부르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은총의 빵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린 양은 희생 제물과 동일시되었다.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위인 희생 제사는 예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에게 드리는 희생 제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발견한다.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창세 4,3-4). 그리고 우리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바친 번제물의 이야기에서 이와 유사한 희생 제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제사 때 장로들은 제단을 세웠는데 이 제단은 영원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번제물과 더불어 제주(祭酒)로 포도주를 함께 봉헌하기도 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제사 가운데 멜기세덱의 제사(창세14,18-20)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제사(창세22,1-18)는 특히 중요하다.
   멜기세덱은 성서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사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인물로 여겨진다(히브 7,1-17 참조). 멜기세덱은 왕이며 동시에 사제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유일한 예이며, 뒷날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창세기는 멜기세덱을 살렘의 왕으로 묘사한다. 살렘은 나중에 “평화의 도시”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이 될 땅이다(시편76,2). 예수님은 뒷날에 천상의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그리고 멜기세덱처럼 “평화의 대사제”로서 오실 것이다.
   멜기세덱의 제사는 아무런 가축도 바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처럼 그 역시 빵과 포도주를 바쳤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제사의 마지막에 아브라함을 축복해주었다.

모리야 땅에서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은 살렘으로 돌아가야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마지막 제물을 바칠 것을 명하신다. 하느님은 창세기 22장 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분부하신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역대기 하권 3장 1절에서 모리야 땅은 앞으로 하느님의 성전이 세워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등에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우고 그곳으로 이사악을 데리고 간다. 이사악이 번제물로 드릴 가축에 대해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라고 대답한다.
   마침내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찌르려할 때 하느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리며 번제물로 쓸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해준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강대한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느님의 계약을 인식하게 된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발행하신 채무증서였으며, 이스라엘에게는 생명보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선택된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죄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느님의 분노에서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이 계약의 맹세를 기억해달라고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출애32,13-14 참조).
   후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십자가상 예수님의 희생 제사에 대한 심오한 상징으로 여겼다. 그 유사성은 실제로 두드러진다. 이사악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희생 제사를 위해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 나무를 등에 지고 예루살렘의 언덕을 향해 걸어가신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타는 모리야 땅에 있는 언덕 가운데 하나이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신약성서 첫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불리며 이사악과 동일시되었다(마태1,1).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말은 그 자체가 예언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창세기 22장 8절을 히브리어 원전대로 읽으면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번제물로 바칠 어린 양으로 고르실 것이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에 의해 예시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갈라3,14;창세22,16-18 참조)

제물로 바치는 가축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생 제사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파라오의 감독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드리는 잦은 희생 제사는 노역을 피하기 위한 순전한 핑계라고 비난하였다(출애5,17 참조). 그러나 후일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엇보다 올바른 일이므로 희생 제물을 봉헌할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고 요구하였다(출애10,25 참조).
   그렇다면 희생 제사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동물을 바치는 희생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희생 제사는 천지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함을 뜻한다.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시편24,1).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때, 인간은 궁극적으로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희생 제사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둘째, 희생 제사는 감사의 표시이다. 천지만물은 사람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으랴? (시편116,12 참조) 우리는 그저 우리가 받은 것을 돌려드릴 수 있을 뿐이다.
   셋째, 때때로 희생 제물을 바치는 희생 제사는 하느님 앞에서 약속과 맹세, 계약을 확증하는 방법의 하나로 바쳐지기도 했다 (창세21,22-32).
   넷째, 희생 제사는 죄를 통회하고, 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속죄의 뜻으로 자신의 목숨 대신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희생양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뜻깊은 희생 제사는 파스카(과월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과월절에 모든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흠 없는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고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날 밤 안에 그 양을 먹도록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면 그들의 맏아들은 살아남을 것이나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모든 맏아들과 가축의 맏배들이 그날 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출애12,1-23 참조). 과월절 제사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은 모든 가정의 맏아들과 맏배를 대신한 몸값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그대로 구원 행위, 즉 몸값을 치루고 되찾는 대속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제의 직분을 맡은 백성”,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 (출애19,6).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출애4,22).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마다 이 파스카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그 전례를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한 말씀까지 가르쳐주셨다 (출애12,26-27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도 매일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쳤다.

– 단행본 ‘Das Mahl des Lammes’ : 한국어판 ‘어린양의 만찬’
– 마리아지 123,124,125,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