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영성 운동(뉴에이지)이란 무엇인가?
2. 신영성 운동(뉴에이지), 왜 위험한가?
3. 신영성 운동(뉴에이지), 무엇이 문제인가?

  20세기에서 시작되었지만 21세기에 더욱 거세어지는 영적흐름이 있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신영성 운동’이라 한다. 우리에게는 아마도 ‘신영성’이라는 단어보다 ‘뉴에이지’라는 단어가 더 익숙할 것이다. 신영성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뉴에이지가 아니면서 뉴에이지와 유사한 동양적인 영성의 추구를 개념화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 스스무와 한국의 노길명 교수가 도입한 개념이다. 취지 혹은 이념은 다르지만 현상에 있어서는 거의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뉴에이지와 신영성의 관계이다. 이름이야 어떻든 이들은 모두 적어도 기존의 종교들이 하는 기능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대체종교’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운동들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종말을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쉽게, 깊이 침투해 오고 있지만 자칫 구분할 수 없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제 그 하나 하나에 주목해 보자.

  뉴 에이지 운동이란
  뉴 에이지 운동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New Age)를 추구하는 운동을 말한다.
  뉴 에이지 운동은 인류의 인간성 회복과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룩하려는 범세계적인 종교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신세계질서, 신세계주의, 신세대, 물병좌 시대, 의식혁명, 새 정신(New Mind), 새 의식, 신사고(新思考), 신초월주의, 인간잠재력 개발, 새로운 여성, 신동방 주의(New Orientalism)를 표방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뉴 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종말을 위한 보이지 않는 대체종교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다음과 같은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의식 및 영성 개발을 목표로 하는 운동들이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염력, 요가, 마인드컨트롤, 초감각적 지각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종교통합 운동이다. 표방하기는 종교통합이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종교혼합’이다. 흔히 서구종교의 사상이나 수련방법에 동양의 사상과 수련방법을 접합시키려는 시도들인데 동서양의 모든 종교적인 요소들을 무차별로 섞어서 변종 또는 잡종의 신흥종교를 만들어 낸다. 구미의 여러 신흥종교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 영매술 및 사탄숭배 운동들이다. 미지의 영적 존재와의 교감을 추구하는 사탄 숭배, 귀신숭배, 강신술(降神術) 등이 이에 속한다.
  넷째, 인간의 정신세계와 과학을 통합하려는 신과학운동들이다. 이들은 종교와 과학, 물질과 정신을 분리된 실체로 보지 않고, 이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인류 평화 시대의 도래를 이룩하고자 한다.
  다섯째, 자연중심사상을 강조하는 생태학주의운동이다.
  여섯째, 외계인(外界人) 숭배 운동이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몇 차원 높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외계인이나 UFO를 숭배하는 운동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우주인들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하면서 세계 정부, 공용 화폐, 국제 군대, 종교간 갈등 해소, 감각 명상, 인류 전체의 행복추구 등을 주장한다.

  일본의 정신세계 운동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정신세계 운동’이 뉴 에이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77년에 『정신세계의 책 베스트 100』과 『정신세계의 레코드 베스트 100』이 나오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추구하는 목적이나 읽히는 서적, 시도하는 방법 등이 앞에서 언급된 뉴 에이지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신세계 운동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윤리 덕목, 또는 국가나 소속집단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일본적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명상, 요가, 신비주의, 오컬티즘(악령숭배) 등에 관심을 가지며, 초능력이나 신비체험이 강조된다.
  그런데, 뉴 에이지 운동이 서구에서 문자 그대로 기성종교 즉 유태교나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 ‘정신세계’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정신세계에서 추구하는 조화와 융합은 동양의 일원론적 세계관, 자연중심주의, 윤회사상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뉴 에이지 운동이 자기 전통에 대한 반문화 운동의 성격이 뚜렷했던 데 반해, 일본의 정신세계 운동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 확립 운동으로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기존의 신종교들과는 달리,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과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신종교 운동은 급속한 사회변동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되고 억눌리고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기성종교의 역할을 비판하면서 나름대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윤리 덕목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신세계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영성 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일차적으로는 지적, 경제적, 시간적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그것을 통한 자기완성에 치중하고 있다.

  한국의 기수련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수련 운동 역시 뉴 에이지 운동과 관련이 있는 요소들을 다분히 공유하고 있다. 기 수련가들이 말하는 ‘기’라는 것이 뉴 에이지에서 말하는 ‘우주에너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뉴 에이지 주장자들은 본래 힌두교의 ‘요가’에서 일컫던 ‘우주에너지’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상으로 삼았는데 이 ‘우주에너지’는 고대 중국의 신비적 종교인 ‘도교의 ‘기(氣)’ 사상과도 일치한다. 도교에서의 ‘기’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우주의 모든 것이 기로 되어 있으며, 기를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실재할 수 없다는 힌두교의 범신론적 사상과 유사하다. 한국의 기 수련 문화는 바로 이런 사상과 잇닿아 있는 것이다.
  기 수련은 본래 ‘기’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전통적인 심신수련방법의 하나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대종교나 동학계, 증산계, 원블교 등 일부 민족종교의 수도방법으로 수용되어 여러 갈래로 전승되고 있다.
  ‘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증대하게 된 배경에는 1980년대부터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현상들이 깔려 있다.
  여하튼 일본의 ‘정신문화 운동’처럼 기수련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비술이나 영술들을 취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정체성 확립 운동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근래에 들어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기성 종교의 교세가 점점 쇠퇴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영성 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있는 현상은 심각하게 짚어 봐야 할 대목이다. 단전호흡, 기공, 요가, 명상운동의 참여자는 이미 2백만 명을 넘었으며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기성종교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신영성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신영성 운동은 어떻게 기성 종교의 신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신영성 운동은 왜 위험한 것일까?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이지 않는다
  신영성 운동이 ‘보이지 않게’된 것은 일차적으로 물리적인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신영성 운동의 활동이 종교-비종교의 경계, 나아가 종교-경제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즉, 신영성 운동이 ‘구원재'(예를 들면 영성 프로그램, 심리 프로그램, 건강 프로그램 등)를 ‘상품화’하여 정신자산을 팔고 사는 ‘소비사회’의 신(新)소비문화를 등에 업고, 종교와 경제의 경계를 침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미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문화자본의 영향과 지배력을 배경으로 신영성 운동은 탈(脫)현대사회의 문화적 흐름을 주도하면서, 야금야금 대중 속을 파고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마디로 신영성 운동은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운동(movement)’도 아니고, 사교(Cult)나 이단종파(Sect)로 분류할 수도 없으며 딱 부러지게 종교(Religion)라고도 지칭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종교대신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히 종교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형태로 대중을 파고들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인 것이다.

  둘째, 다면적(多面的)이다
  신영성 운동은 여러 얼굴로 나타난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은 영적인, 사회적인, 정치적인 것의 혼합체이며 사회학, 신학, 철학, 순수과학을 다 포괄하고 있는 운동이다. 또한 현대 심리학, 의학 등 전문분야에 기초를 둔 잠재력 계발 운동인 동시에 스포츠이기도 하다.

  셋째, 네트워크(그물망) 조직을 활용한다
  이는 특히 뉴에이지에 해당하는 말이다. 보통 그들은 작은 집단이며 더 이상의 형태적 조직 없이 나타나고 있고 대부분은 책, 잡지, 신문, TV, 점성학 책들에 의한 대중 매체와 회의, 전화통화, 유령조직, 강연, 연수회 훈련 테이프 등 정치적 제휴를 통해 서로서로 통합되고 확산된다. 이들 작은 그룹은 서로 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뉴에이지’라고 선언하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연락망을 가지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의 중요한 서적인 퍼거슨의 ‘뉴에이지 혁명’은 뉴에이지 조직이 한 점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연결되는 그물망 조직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도자는 없지만 강력한 어떤 조직망이 이제 미국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순간이다. 이 조직망이야말로 ‘물병자리 시대의 공모’ (Aquarian Conspiracy)이다. 이 공모자들의 조직에는 정당, 이념, 단체, 사교회 또는 우애회 등의 전형적 형태의 조직이 없다. 소규모 모임과 느슨한 조직망이 있을 뿐이지만, 이 공모에 참여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다. 이들은 강의실에서, TV에서, 인쇄물을 통해서, 영화 안에서, 미술 분야 안에서, 노래를 통해서, 과학 잡지에서, 순회 강연 중에서, 커피타임 중에서, 정부 문서상에서, 모임석상에서 그리고 새로운 조직의 정책수립 및 입법과정 등에서 새로운 대안을 설명하고 있다. 변혁에 대한 사상은 건강 관련 책자나 스포츠 입문서, 다이어트, 사업 경영, 자기 주장, 스트레스, 인간 관계, 자기 개선 등에 관한 책자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넷째, 탁월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
  신영성 운동이 내세우는 영성 상품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유혹적으로 보인다. 마케팅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뉴에이지는 현대인이 호감을 갖고 있는 인본주의, 동양의 신비사상, 평화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화합과 통일,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는 희망 등으로 그들의 주장을 포장하고 상품화하여 시장에 내놓는다.
  그리하여 (1) 서구사회에서 신영성 운동은 1960년대의 반(反)문화운동을 주도한 뉴레프트(신좌파) 세대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1970년대 이후 전통사회와 물질문명에 반감을 갖는 모든 이들 사이에 이른바 ‘탈(脫)물질적 가치들’을 확산시킴으로써, 지배적 문화흐름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와 문화적 정체성 확립과 생존의 욕구가 강했던 ‘386 세대’들을 중심대상으로 하여 동양적 전통문화에 의지하고 있는 ‘기(氣) 수련문화’가 널리 유행하는 한편, ‘신세대’들 사이에서 마법과 전설, 신화들이 어우러진 ‘판타지(Fantasy) 문화’가 흥행을 올릴 수 있었다. 서구 문화의 판타스틱한 요소들에 강한 동경을 갖고 있는 신세대에 맞는 마케팅이 주효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상을 차별화하여 관심과 흥밋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구매력을 증대하는 효과를 올려왔던 것이다.

  다섯째, 장기적이며 단계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신영성 운동은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뉴에이지는 궁극적으로 ‘단일세계경제’ 체제 확립으로 ‘단일세계정부’를 탄생시킨 후, ‘단일세계종교’라는 종교통합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지만, 그 목표는 야금야금 제시되기 때문에 대번에 부담감이나 경계심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부지불식간에 젖어드는 것이다.

  여섯째, 대중문화를 통해 침투한다
  이들 여러 형태의 뉴에이지 운동은 전략적으로 대중문화를 통해 암암리에 퍼져 나가기를 원한다. 신영성의 다양한 변종은 문화의 형태로 대중 속을 파고들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스며들다 보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연스레 이를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이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영성 운동은 무엇이 문제인가?

  신영성 운동의 확산은 그리스도교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신영성 운동은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충하는 우주관과 구원관을 기저에 깔고 교묘하게 그리스도교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영성 운동의 사상은 반(反) 그리스도교적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단일론을 내세운다 (우주관)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일원론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일원론은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수렴된다는 사상으로서 현존하는 현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러나 단일론은 차별이나 구분 자체를 인정치 않는 경직된 합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영성 운동은 현상세계의 차이를 인정치 않고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믿는다. 서로 구별되는 요소들, 곧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합리성과 비합리성, 과학과 주술,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천사와 악마, 과거와 미래 등을 무차별하게 합일시키려 한다.
  결국, 신영성 운동의 단일론은 그리스도교의 세계관과 윤리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영성 운동은 ‘선’이나 ‘악’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고 타율적으로 부여된 절대 기준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신영성 운동은 “모든 것은 선하다.”의 상황윤리를 내세운다. 본래 자연적인 것은 모두가 ‘선’한 것인데 그리스도교가 인위적으로 선과 악의 기준과 경계를 만들어 놓음으로 해서 원래 없었던 ‘악’의 개념과 죄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는 악(의 세력)이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한 기발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대적하여 싸운 악과 악령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세계관이며 절대 윤리관을 희석하는 자율 윤리관, 나아가 윤리적 무차별주의인 것이다. 회개와 심판 자체까지도 부정하는 거짓 이론인 것이다. 이는 영적 깨달음이나 초능력의 발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는 신념과 어우러져서 윤리적인 타락과 거룩함을 뒤섞어 놓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둘째,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는 범신론을 내세운다 (신관)
  신영성 운동은 인간 밖에서 존재하며,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로서 신 관념을 배제하고, 신을 흔히 생명력과 같은 우주적 에너지 또는 ‘기(氣)’로 간주한다. 신은 절대 존재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 여겨지고, ‘종교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영적'(spiritual)이라는 용어가 더욱 선호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이나 영성에 주목하면서 ‘영적 깨달음’을 추구한다. 의식 변용, 영의 진화를 통해 궁극적 목표인 온전한 신성에 도달한다는 교리는 기성 종교인 뿐 아니라 무신론자들에게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여기에서 (초월)명상, 요가, 강신술 등의 실행방법이 타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과 신성에 이르기 위하여 이러한 동양의 전통적인 종교 수행법 외에도, 서양의 유태교와 그리스도교 계시사상, 영지주의, 정신분석 심리학, 과학 및 생태학의 성과 들이 구별 없이 원용(援用)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영성 운동은 강한 혼합주의(syncretism) 성향을 띤다.
  “신은 만물 안에 존재하고 따라서 만물이 곧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와 같은 범재신론(汎在神論)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이나 인격신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거부한다.

  셋째,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환생한다”는 윤회사상을 믿는다 (내세관)
  창조를 부정하고 하느님 자체를 없애버리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내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달래주는 기발한 대안이 바로 윤회설이라 할 수 있다. 근래에 심령과학, 최면 등을 이용하여 윤회설을 입증하려는 시도들이 TV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영매가 그 사람의 영에게 질문을 하면 자신은 15세기에 어느 나라 어디에 살던 누구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는 잠재의식, 무의식이 빚어낸 일종의 꿈과 같은 환상이라는 것이 미국 심리학계의 견해이다.
  윤회사상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뉴에이지 운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힘을 가진 에너지에 불과하다. 즉, 평범한 인간 예수가 깨달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의식’을 얻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 견지에서 보면 예수의 강생, 삶, 십자가를 통한 구원업적 등이 상대화되고 심지어는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된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정신세계 운동이나 한국의 기수련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넷째, 밀교적 신비주의를 내포한다 (수행관)
  신영선 운동은 하나같이 ‘신성’에 이르는 여러 단계를 제시한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에 이를수록 밀교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즉,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 의식이 공개된다. 이런점에서 신영성 운동은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와 유사하다. 뉴에이지는 2-3세기에 그리스도 신앙을 위협했던 교대 영지주의와 자주 연관된다.
  최근 문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물을 가진 분,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2003,2,3)에서 교황은 뉴에이지를 현대판 영지주의로 보고 뉴에이지를 가장한 고대 영지주의로의 회귀를 경고하고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영지주의자들은 교회의 공적 설교에 반대하고,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입교자에게만 알려진 비교(秘敎)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원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영적 지혜는 소수의 선택된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전승되기도 하였다. 밀교는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이중적이다. 공개되는 부분과 비공개적인 부분이 있다. 통일교가 이러한 밀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핵심적인 교리와 제도, 의식은 핵심 내부인들에게만 은밀히 알려져 있다.

  결론
  성서신학 및 영성신학의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일련의 신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사탄)의 거짓 주장과 너무도 흡사하다. 뱀(사탄)은 하와를 다음과 같은 말로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세기3,4-5). 여기서 뱀이 내세운 “너희가 하느님 같이 되리라”는 유혹은 ‘범신론’으로,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는 유혹은 ‘윤회론’으로, “너희가 선악을 알리라”는 유혹은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상황(상대)윤리로, “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는 유혹은 밀교주의로 변형되어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신영성 운동이란 태초에 인류를 공격한 사탄의 속임수의 재현이고,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 성모기사 2004년 1월호, 2월호, 3월호. 인천교구 사목 연구소 소장 차동엽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