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토요일 배상의 첫 번째 이유
–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부인하고 모독하는 것에 대한 배상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이 말씀은 성녀 벨라뎃다가 성모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성모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대답인가! 그것은 성모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성모님은 어떤 개신교 작가가 언급했듯이 “우리 죄 많은 인간 본성의 유일한 자랑이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특히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교회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는 이를 교의로 선포했다.
  성모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을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잉태 된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호되었고 충만한 은총을 받았다. 성모님의 이 특권은 가톨릭교회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힘과 승리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루가 19, 10). 그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일을 하신다.
  세례 때에는 우리의 원죄를 몰아내시고 세례 후에는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본죄도 함께 몰아내신다. 동시에 우리를 위해 공헌하신 당신의 구속적인 죽음으로 성취하신 거룩함의 한 몫을 우리 각 영혼에게 주입시키신다.
  예수님께서는 고해성사 안에서 세례 후에 우리가 범한 본죄를 모두 용서해 주신다. 그것은 부활절 밤에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주심으로써 이루어졌으며 그 일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수세기 동안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이 두 경우에서 본 것처럼 죄는 이미 인간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 죄를 용서받은 후에도 지나간 흔적에 상처와 나약함의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성모님의 경우에는 이와 판이하게 달랐다. 성모님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이 너무나 컸기에 원죄와 원죄에 잇따르는 본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셨다. 이러한 성모님의 특권은 특별한 구속의 힘을 입은 것으로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예견된 공로 덕분에 원죄로부터 보호받은 존재로 구원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성모님은 특별한 성화 은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의 거룩함을 다 모아도 성모님의 거룩함을 능가하지 못한다.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모독
  이 모독은 틀림없이 사탄으로부터 온다. 사탄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을 부추긴다.
  첫째, 사탄은 이 교의가 나타내고 있는 예수님의 권위와 승리에 분노를 느낀다. 그는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그로 하여금 우리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신 힘이 완전히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사탄은 잉태 첫 순간부터 그리고 평생 동안 원죄가 없으셨던 성모님의 완전한 승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 군대를 정복하실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둘째, 사탄은 성모님의 원죄 없는 거룩함에 깊이 분개한다. 그것은 그가 한순간조차도 성모님에게 힘을 미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사탄의 지배와 속임수의 어둠을 통과하여 빛나는 찬란한 빛과 같다. 사탄은 그 빛을 막을 수도 멈추게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인류에게 가하려 하는 악을 성모님께서 들추어내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따라서 그는 신비스러운 사상을 의식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혹은 도덕적으로 나약한 단순한 사람들을 부추겨 성모님의 놀라운 특권에 반대하여 증오를 드러내거나 조롱하거나 멸시하게 한다.

사탄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여인”
  사탄이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라는 특권을 증오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동정녀 마리아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머리를 밟아 부술 “여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원조들이 원죄를 범하도록 사탄이 속이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enmity)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의 머리를 밟을 “여자”는 분명히 옛 하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이미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만심으로 가득 찼으며 사탄의 속임수로 금지된 열매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여자”는 누구인가?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 여자로 보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도 당신의 어머니를 두 번이나 “여인”으로 언급하신다. (내가 대학에서 성서를 공부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여인”으로 언급한 것은 모든 고대 히브리 문학과 그리스 문학 사이에서도 아주 독특한 표현법이었다고 배웠다.)
  첫 번째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말씀하셨다(요한 2, 1-11 참조).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깊은 신뢰와 믿음에 감동받은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당신의 첫 기적을 행하셨고 이것은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두 번째로 언급하신 때는 갈바리아 산의 십자가 위에서였다(요한 19, 25-27 참조).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으로 대표되는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의 어머니께 맡기신다. “그 어머니에게는 ‘여인이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사탄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원죄 없는 잉태 교의가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너(뱀, 사탄)를 여자(성모님, 새 하와)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핵심 단어는 “원수(enmity)”이다. 이 단어는 아주 지독한 마음을 내포한다. 영어 단어 enmity도 아주 강한 억양을 담고 있는 단어이지만 원 히브리어의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뿌리는 둘 사이의 지독한 증오를 내포한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조차도 절대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을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따라서 성모님과 사탄은 결코 서로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탄이 성모님의 영혼에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영향력이나 지배를 받지 않는 원죄 없는 잉태는 죄 많은 인류를 지배하려는 사탄의 보편적인 영향력을 파괴시키는 출발점을 의미한다. 사탄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시작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애
  원죄 없는 잉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어머니를 만들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께 주신 놀라운 선물이었다. 이 특권은 성모님을 어떠한 죄와도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성모님은 아무 죄도 없을 뿐 아니라 은총으로 가득 차 계셨다. 이러한 성모님께 천사가 전해 주는 주님 탄생 예고와 더불어 육화가 일어났다. 즉 예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영혼의 지극히 순수한 몸으로부터 살과 피를 취하셨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 사탄의 분노는 분명히 극에 달했으리라(요한 묵시 12, 12 참조). 사탄은 이 특별한 성모님의 특권을 반대하는 사탄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모독과 모욕을 잔인하게 부추기고 있다.

배상의 중요성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모독하는 죄에 대해 배상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큰 특권 즉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특권에 대해 성모님을 공경하게 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성모님께 주신 원죄 없는 잉태라는 특별한 은총을 공경하지 않는 모독 때문에 아주 마음 상해하신다. 이 큰 불경에 대해 우리는 합당한 열성으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들어 높이고 공경함으로써 보상하고 배상해야 한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성모님의 마니피캇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가 1, 49).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모독을 배상하는 첫 토요일 신심의 실천과 더불어 우리는 성녀 가타리나 라브레에게 맡기신 기적의 메달을 착용할 수 있다. 기적의 패의 모양은 성녀 가타리나의 환시에서 보여 주신 것으로 그것은 정말 하늘에서 마련하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패는 성모님께 드리는 의미 있는 기도를 포함한다.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우리는 기적의 패를 착용하고 자주 그 기도문을 반복하여 기도함으로써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모독을 배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첫 토요일 신심을 지킬 것과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의 특권을 공경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성모님이 참고 계신 모독들에 대한 더 큰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죄와 사탄의 권력에 맞서 성모님의 특별하고 힘 있는 보호를 얻게 될 것이다.

첫 토요일 배상의 두 번째 이유
– 성모님의 영원하신 동정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한 배상

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봉헌된 정결을 위한 모범이며 격려가 되는 덕행이다.

동정녀 마리아
  성모님의 호칭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호칭 중의 하나는 “동정녀 마리아” 이다. 이 호칭은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호칭이다. 성 루가는 주님 탄생 예고 사건을 묘사하면서 두 번이나 성모님을 “동정녀(virgin)” 라고 언급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virgin)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virgin)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루가 1, 26-27).
  성 마태오 역시 그의 복음서에서 성모님의 동정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잉태가 성모님과 성 요셉과의 육체적인 결합없이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virgin)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마태 1, 18-25).

성모님의 동정성은 영원하다
  이 두 복음서의 인용문들은 ‘성모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태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순간에 동정녀(virgin)였다.’ 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교의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A.D 215)는 이 사실을 드러낸 초대 교회의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이다. “오 위대한 신비여! 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시여, 잉태 후 동정녀로 아기를 낳으셨으며, 출산 후에도 계속 동정녀로 남아 계시나이다.”
  교황 성 마르틴 1세 때 라테라노에서 있었던 교회 회의(A.D 649)에서는 ‘하느님의 진정한 어머니이신 거룩하고 동정이시며 원죄 없으신 마리아께서는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그리고 남자와의 결합없이 성령으로 말씀이신 하느님을 잉태하셨고 아무 손상 없이 그분을 낳으셨으며 출산 후 동정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다.’ 라는 교회 교부들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았던 몇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성모님의 평생 동정 교의를 정의하였다. 이 교의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도, 잉태 동안에도 그리고 출산 후에도 동정이시다.’ 는 언어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이미 “탄생 전”이라는 구절의 의미가 위에 설명된 복음에서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 다른 두 구절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동안” 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밝혀주신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행위를 통해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시는 순간까지 그녀의 동정성을 잃지 않았다.’는 믿음을 표현한다. 교회의 교부들은 ‘복되신 어머니의 태는 닫혀진 채 어떤 흠도 없이 보존되었고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닫혀있던 문을 통과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고 말한다(요한 20, 19 참조).
  “출산 후에도 동정이시다.”라는 말은 좀 길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말에 대한 몇 가지 반박이 몇 세기 이상 계속 되어 왔기 때문이다. “출산 후에도 동정이시다.”라는 표현은 가톨릭 전통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후에도 결코 성 요셉과 육체적인 결합을 가지지 않았으며, 한평생 흠없는 동정성을 보전하셨다는 교의적인 믿을 교리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동정을 지키는 데에 아주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그 후에 동정을 포기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먼저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인하는 의견의 근거를 간략히 살펴보자.
  가장 큰 어려움은 초대 그리스도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성서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 때문이었다(마태 13,55 ; 마르 3,31-35. 6,3). 그런데 만일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출생 후 다른 아들들을 낳았다면 어떻게 성모님께서 영원한 동정녀로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성 에피파니오(A.D 403)는 “‘주님의 형제들’이 성 요셉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라는 근거를 복음서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좀 더 나은 설명은 히브리어와 주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인 아라메니아어에서는 “사촌”에 대한 구체적인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형제라는 단어는 보통 사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오늘날에서도 ‘형제’라는 단어는 단순한 동료를 포함해서 어떤 인종적인 그룹 안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내 경우를 말하면, 어떤 혈연 관계나 형제 관계도 아닌 동료 수사를 부를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주님의 형제들”이라는 말은 결코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말과 같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들 중 두 사람, 야고보와 요셉은 확실히 우리의 성모님이 아닌 또 다른 마리아의 자녀들이라고 복음서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마태 27, 56 참조).
  마지막으로 신약성서의 어디에서나 “형제”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혈연 관계가 아닌 동료나 제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사도 1,15 ; 1고린 5,11. 15,6 참조).

평생 동정을 서원한 마리아
  성모님께서 동정으로 지내려고 결심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메시지에 대한 그녀의 응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 34)
  초대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의 전통에서는 마리아의 질문에 그녀가 이미 성령에 의해 자신의 동정성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엄숙한 약혼이 끝난 후 성 요셉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려고 했을 것이고,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의 예고를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떻게 임신할지 당연히 추정했을 것이며 그녀는 질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모님의 질문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엄숙한 약혼 기간동안 성 요셉과 어떤 육체적인 관계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결코 그와 관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천사의 방문을 받던 그 순간에 동정이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평생 동정으로 머무실 결심을 하셨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
  봉헌된 동정성은 구약성서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동정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치신 대로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 생활”의 양상이었다(마태 19,10-12 참조). 성모님께서는 틀림없이 성령의 빛에 의해 평생 동정에 대해 영감을 받았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과 극도의 거룩함은 성령의 감도에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봉헌된 동정성을 명확히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성을 영적인 보물로 꾸준히 봉헌할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교회 박사로 선포되신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만일 성모님이 하느님께 바친 동정 서원을 깨뜨림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면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작은 꽃은 성모님은 이미 하느님께 드린 것을 결코 되돌려받지 않았을 것임을 확신했다.
  교회의 역사가들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에 대한 교의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기를 원하는 많은 남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제 생활과 수도 생활에서 봉헌된 정결의 이상형은 동정 마리아의 모범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몇몇 자유주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던 진리가 마치 교회의 가르침으로 선포되지 않은 것인 양, 그 시대 교회 안에서 신학적인 논란이 된 완전한 자유주의의 태도로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라테라노에서 있었던 교회 회의(A.D 649)에서부터 15세기 이상 교의로 받아들여져 왔던 성모님의 영원한 동정성은 교회 안의 몇 사람에 의해 의혹의 대상이 되고 거부되기 시작했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 후반의 사회 풍토 속에서 미국의 서부 문화가 이른바 “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퇴폐적 결과를 경험한 후, 일부 가톨릭 신자들조차 진실된 가톨릭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새로운 성 도덕”을 따라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모님의 평생 동정에 대한 가르침과 모범이 그들이 퍼뜨리고 있었던 성적 방종에 대해 윤리적인 질책을 가한다고 하여 이를 거부했다. 풀톤 쉰(Fulton J. Sheen) 주교는 그것에 대해 이렇개 말했다. “사람들은 생각으로는 아무도 이교적이 되지 않지만 살고 싶은 방식에 있어서는 이교적인 방식을 취한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가졌는데,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은 곳에서는 여성스러움과 모성과 순결함이 가장 존경받는 덕행으로 생각됩니다.”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육의 죄를 이기는 방벽이다. 만일 마리아 신심이 거부되면 성적으로 난잡함으로 이르는 길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봉헌된 동정 또는 평생 동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결의 덕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성 광신주의 사회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거부하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비난하며 공격하는 이유이다. 나는 거칠고 소란스러웠던 60-70년대에 “독신제를 타도하라.”와 같은 슬로건이 나돌았던 것을 기억한다. 같은 방식으로 지금은 교회 안팎에서 사제의 독신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봉헌된 정결을 위한 모범이며 격려가 되는 덕행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부인하여 성모님을 모독해왔다. 우리는 첫토요일 신심을 통해 그것에 대해 배상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결혼 전에 간직했던 정결은 이 덕행의 또 다른 중요한 표현이다. 오늘날 많은 십대들은 자신이 아직 “동정”이라고 말하면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것은 “모든 십대는 성적 욕구를 자제할 수 없다.” 라는 추측을 널리 퍼뜨리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에 대해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린다.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받은 성이라는 선물이 결혼 생활을 위해 보존되어야 하는 특별한 선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결혼 전에 자신의 동정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모범으로 성모님을 바라보게 해야 하며, 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보호를 청하라고 권고해야 한다. 성모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큰 후원자이시다.
  그러나 세상은 성모님의 영원한 동정성을 분명히 모독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독들을 배상해야 한다. 그리하면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의 힘으로, 정결의 덕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를 더 충실히 지킬 수 있게 될 것이고 성적 혼란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자비심으로 회개하여 돌아오게 되는 큰 은총을 얻게 될 것이다.

첫 토요일 배상의 세 번째 이유
–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부인하는 이들에 대한 배상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신앙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은 가장 소중한 가톨릭 신앙 중의 하나이다. 성모님의 이 특권은 하느님께 받은 모든 특권들의 기초요 근거가 된다. 마리아는 모든 여인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되었고, 예수님의 탄생 전에도 후에도 동정이셨으며(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특권), 인류 구원 사업에 예수님과 함께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셨고(공동 구속자로서의 특권), 지상의 삶이 끝났을 때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성모 승천의 특권).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성모님께서 이 모든 특권들을 누리신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머니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 최고의 축복을 주는 것이 허락된다면, 어머니들 가운데 자신의 어머니를 최고의 어머니로 높여드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가 그러할진대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그렇게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자신의 어머니를 선택하셨고, 모든 어머니들 가운데 최고의 어머니로 모시기 위해 아낌없는 선물을 주셨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오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성모님께서, 신성(Divinity) 안에 계신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 가운데는 종종 이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이신 제 2위격은 영원부터 존재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만일 마리아께서 신성 안에 계신 예수님을 낳으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시작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성모님을 초월적 여신(女神)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성모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간단하고도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본성(Nature)”과 “위격(Person)”이라는 철학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영적인 본성들(Spiritual natures)
  “본성(Nature)”은 힘과 능력을 가진 어떤 것의 성질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본성은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본성을 천사입니다. 본성은 남자 혹은 여자입니다. 본성은 동물입니다. 본성은 하느님입니다.
  본성은 그 본성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성을 가지신 하느님은 무한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계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다른 어떤 본성들도 하느님의 본성이 지닌 힘을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 이외의 나머지 다른 본성들은 창조된 피조물이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에게도 본성에 맞는 힘과 능력을 주셨다. 순수한 영적 존재인 천사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입된 방대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가진 남자와 여자는 부분적으로는 영혼을 하진 영적 존재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가진 물질적 존재이다. 그들은 지능이 있어 사고할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어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어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이 있다. 또한 그들은 감각을 사용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으며, 번식력과 같은 육체적 힘에서 나오는 능력도 소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온전히 물질적인 본성만을 가진 동물들은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여기 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기 종족의 번식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을 인간이 소유한 지능적인 사고력이 부족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위격(Person)
  “위격(Person)”은 지능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즉 자기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존재에만 해당된다. 따라서 “위격(Person)”은 “행위자(Agent)”라고 말하거나 혹은 각자가 지닌 본성의 힘을 통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격은 “그것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위격”에는 단 세 가지 범주만이 있다. 첫째, 성부 하느님이 가지신 하느님의 위격, 둘째, 성 미카엘과 같은 천사의 위격, 셋째, 성녀 데레사와 같은 인간의 위격이 그것이다. 동물들은 지능적 사고력과 자유롭게 선택할 이성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위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신성
  “본성(Nature)”과 “위격(Person)”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알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 선포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교의에서 예수님 안에 두 가지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신 예수님의 위격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즉 예수님은 복되신 성삼위의 제2 위격인 하느님의 위격을 지닌 분이시다. 영원으로부터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신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고 계시는 동안에도 그리고 인성을 취하셨을 때도 하느님의 제2 위격이셨다. 그분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성취되기 위해 성령의 힘이 마리아에게 내려왔을 때 복되신 마리아의 태로부터 살과 피를 취함으로써 인성을 취하셨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성령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의식과 지능, 자유 의지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위격을 가지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리아로부터 취한 인간 본성을 통해 하느님의 제2 위격이신 분께서 행동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의 기적과 그분의 고통,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인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주체인 신적 위격에 귀속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성
  이제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어머니” 라는 호칭을 가지신 성모님께 적용시켜 보자. 어머니라는 존재는 항상 한 인격(Person)의 어머니이다. 비록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를 함께 잉태시키고 하느님께서 잉태 순간에 그 아이에게 영혼을 주입시키지만 (이것이 모든 인간의 생명이 잉태 순간부터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 어머니는 그 사람 전인격(全人格)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분이 요한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하지, “이분이 요한의 육신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하거나 “이분이 안나의 육신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모성은 항상 인성을 가진 한 인격(Person)에게 적용된다. 그런데 온전히 하느님이시요 온전히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일한 위격은 하느님의 제2 위격이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을 아들로 두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들로 두신 예수님의 인성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고 하느님의 위격을 가지신 분의 어머니, 즉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특별한 방식으로 AD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 (에페소는 현재 터키에 있다. 가톨릭 전통에 의하면 십자가의 발치에서 예수님께 성모님을 돌보라는 말씀을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 성 요한이 그 당신 큰 규모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에페소로 성모님을 모시고 갔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성모님이 돌아가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던 곳도 그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곳은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의 순례 성지이다.)
  그 당시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게 마리아를 그리스어로 “테오토코스(Theotokos)”라고 부를 수 있는지 물었다. 그 말의 의미는 “하느님을 낳은 이”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그 주교는 ‘Theotokos’라는 호칭으로 마리아를 불러서는 안 되며, 다만 ‘그리스토코스(Christokos)’, 즉 그리스도를 낳은 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 속에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제2 위격뿐 아니라 인성을 가진 인격(그리스도)도 함께 있다는 의미가 표함된다. 이 가르침은 이단이 되었고, 그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네스토리우스 이단(Nestorianism)”이라고 불린다. 이 이단은 강생의 온전한 실제성을 축소시켰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그리스토코스로 호칭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격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오셔서 거기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즉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는 인성을 가진 인격과 신성을 가진 신격이 함께 있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인성 안에 작용하고 있는 “행위자(Agent)” 는 단지 인성을 가진 인격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도 유한한 공로만을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따라 인격(그리스도)만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면 그의 죽음의 공로로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격만이 무한한 공로를 가진 행위를 성취할 수 있으며, 순수한 인간은 우리의 죄를 기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유일한 위격은 하느님의 위격이라는 진실된 가톨릭의 가르침대로라면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전 세계를 구원할 만큼의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에페소 공의회에서 알렉사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적 가르침을 비난했고, 성모님을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을 낳은 이”, “하느님의 어머니” 라고 선포했다. 이 선포를 듣고 에페소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기뻐서 9일 동안 “테오토코스, 테오토코스”라고 외치며 에페소의 거리를 행진했다.

첫토요일 배상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는 것은 에페소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은 기쁨을 준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매우 특별한 교회의 이 가르침을, 오해로든지 고의적인 불신에 의해서든지 부인하거나 조롱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매달 연이어지는 다섯 번의 첫토요일에 배상 행위를 해야 한다.
  성모님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감사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 에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큰 영광을 선포하셨다.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권능을 떨치시는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도다. 그분 이름 거룩하도다” (루가 1, 48-49).

첫 토요일 배상의 네 번째 이유
– 성모님께 대한 신심으로부터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소외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배상

“그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마태 19,13)

  복음은 한 무리의 어머니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다가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길 청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주님의 마음을 아주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성가시게 하는 골칫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그 시대에 인정을 받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이 예수님 가까이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분명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태 19,14~15)

어린이들에게 마리아에 관해 자주 말해줄 것
  이 사건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교회는 어린이들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교회와 교회의 교의, 성사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그 모든 것 안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이라는 교회의 풍요로운 보물이 특별한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아의 십자가에서 몸소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27).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것보다 더 본능적인 것은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는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가질 수 있고 성장 단계에 따라 그 사랑은 더 깊어진다. 내 조카의 예를 보면, 내게 있어 특별한 그 조카는 뒷뜰에 성모상을 모시고 있는 삼촌의 집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가족들은 그녀가 성모상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마치 복되신 어머니와 활기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몰두해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누구든지 그 모습을 보면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과 순진한 어린이의 마음 사이에 오가는 어떤 통교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모님에 관해 침묵하는 것
  마리아 신심의 기초는 보통 가정에서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신심의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말씀과 실천히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어린이들은 성모님이 자기 부모들에게 중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듣고 보았을 때 자신들에게도 소중한 분으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종교적 진리에 관해 잘못 믿고 있는 이른바 어떤 “개방된 사고”를 저녀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데, 그것은 종교에 관해서는 자녀들에게 어떤 특별한 교육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애들이 크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한다. 그러나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을 자녀들의 의사에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 아이가 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배우기 위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실제적으로 무언가를 말해 주고 있다. 철학자들은 막 탄생한 인간의 마음을 “Tabula rasa”라 한다. 즉 “백지 상태”라는 것이다. 마음은 지식을 얻기 위해 경험이나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종교의 진리에 대한 것, 특히 복되신 성모님께 관한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아이에게서 성모님의 존재에 대해 알 권리조차 빼앗는 것이 된다. 우리가 역사의 인물들을 공부할 때처럼 누군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해서 배우거나, 그 사람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모님에 관해서 부모 쪽에서 침묵하는 것은 자녀에게 성모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성모님은 그다지 중요한 분이 아니라는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동시에 중요한 종교 진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인 진공 상태를 남기게 되어 잘못된 생각과 부도덕한 가치를 형성시킨다. 이런 것들은 왜곡된 가르침과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정열의 유혹과 부정적인 소문의 영향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피할 수 없다(마태 18,7 참조).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은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즉 위로 오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통해 작용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위로 들어올리고 부도덕으로 빠지기 쉬운 마음을 억제하는 힘을 준다.
  만일 부모들이 복되신 어머니에 대해 기쁘고 열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말한다면 그 자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나는 항상 한 아이의 최초의 신앙은 실제로 그 부모로부터 또는 아이들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 즉 조부모, 선생님들, 대부모의 신앙에 동참하면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들은 이 참여 신앙을 자기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어 간다.

무엇이 어린이들로부터 성모님을 떼어 놓는가?
  연이어지는 다섯 번의 첫토요일 신심을 통하여 우리는 부모나 다른 이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어린이들에게 복되신 동정녀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 배상을 한다.
  그러나 더 나쁜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복되신 어머니에 대해 무관심, 불경, 혐오감, 심지어 경멸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이다. 이것에는 많은 동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성모님을 우리와 예수님 사이를 떼어 놓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는 종교적 태도나 편견이다. 그들은 우리가 곧장 예수님께 가면 되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가는 건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 누구를 통하여 세상에 올 수 있었던가? 그리고 성서에서 마리아의 마지막 말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말씀이 과연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떼어 놓는 말씀이던가? 우리는 배상을 할 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마리아가 예수님께로 가는 확실한 길에 마련된 열린 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 또한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반대한다. 그들은 진정한 여성주의의 필수적인 요소들, 주로 동정성과 모성애를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옹호하고 있는 난잡하고 왜곡된 성적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동정성을 반대한다. 또한 책임감 없는 쾌락의 욕구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모성도 거부한다.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은 젊은이가 결혼 전에 일생 동안 결혼이라는 사랑의 결합을 이룰 배우자를 위해 지키는 동정성을, 보전해야 하는 선물로써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또한 모성을 거부한다. 모성이 여성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특성이며, 남편과의 결합을 통해 하느님의 일에 협조하여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성모님은 당신의 충실한 자녀들에게 동정녀요 어머니로 공경받고 있다. 성모님은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신다. 그러나 동정녀요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왜곡된 가르침에 대한 반대자로 서 계시고 비웃음과 모욕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퍼뜨리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이성과 마음에 하느님의 어머니를 반대하는 해악을 주입시킨다. 결국 오늘날의 세속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정신은 우세해졌고 결국 그 해악은 오염된 공기 속에서 숨쉬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병들게 할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이 많은 가톨릭 부모들과 교육자들의 생각에 스며들어 갔고 전염병처럼 우리 가톨릭 젊은이들에게도 감염되어 그들은 성모님을 아예 모르게 되었거나 또는 성모님에 대해 편파적이 되어 버렸다. 스페인의 폰테베드라 수녀원에서 성모님께서 루치아 수녀에게 요청하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성모님을 거부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해 배상해야 하고, 성모님에 대해 깊이 뿌리 박힌 그런 모욕적인 마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필요한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성모님은 하늘의 영광 속에 계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고통을 당하실 수는 없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모님의 많은 영적 자녀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면에서 아직도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보잘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마태 18,6) 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고의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를 거부하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죄벌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우리는 진심으로 젊은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바쳐야 한다.

치열한 영적 전투
  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 사이에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에 다양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그 투쟁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 오늘날 이 사회에서는 더욱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특히 젊은이들의 이성과 마음을 덮쳐 그들을 정복하려는 투쟁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20세기의 지독한 “주의”들에서 이러한 것을 보았다. 공산주의는 가장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부모와 갈라놓음으로써 가정을 깨뜨렸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적절한 도덕적 가르침과 깊이 있는 종교 교육을 막아 버렸다. 특히 이런 일은 신앙이 깊었던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치주의는 “젊은 군단”을 내세워 으시댔다. 젊은이들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민족 우월주의”를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교설에 체계적으로 복종했다. 결국 그것은 세상에 엄청난 파멸을 가져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정신은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속에 사는 우리 후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아직도 발견되고 있다.
  매스 미디어는 오류와 부도덕적 가치로 젊은이들을 폭격했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젊은이에 관한 MTV(편집주 : 24시간 유행음악과 가수 그룹을 방송하는 음악 TV 방송)의 부정적인 도덕적 결과들을 상상해 보라. 최근에는 국제 연합의 인사들조차 젊은이들의 지지력을 얻기 위해 동성연애를 하는 젊은이들을 옹호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법은 어린이들을 부모의 권위와 보호에서 떼어놓기 위한 시도이다. 어린이들은 부도덕한 어른들에 의해 시도되는 착취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끄는 교회는 이 무자비한 투쟁과 그 투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전투의 전열에 선 양쪽 다 젊은이들의 이성과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미래의 열쇠를 통제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교황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폴란드에서 젊은 사제였을 때 공산주의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접근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지금까지도 교황은 그때와 똑같이 세계 청소년 기도 대회를 통해 전세계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계속 접근하고 있다. 우리도 교황을 도와 연이어지는 다섯 번의 첫토요일 신심을 이행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행해진 악에 대해 보상하고 마리아를 통하여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회개할 있는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배상해야 하겠다.

첫 토요일 배상의 다섯 번째 이유
– 성모님의 성상이나 상본을 모욕하는 이들에 대한 배상

  예술은 어떤 사회에서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 문학, 음악 등 여러 형태의 예술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해 둔 가치, 미(美), 열망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은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랑과 고독 심지어는 공경과 불경까지의 모든 감정들을 표현한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인 셈이다.

종교 예술의 강력한 영향력
  종교 예술은 이 모든 표현들 중에서도 뛰어나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심오하고 거룩한 심성들, 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솟아나는 감정들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술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 의식을 갖도록 도와주며 우리를 감동시켜 더 열렬히 기도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사랑과 그 섭리적인 돌보심을 더욱 신뢰하도록 이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항상 예술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지난 세기, 글을 모르는 많은 신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을 그려 놓은 예술 작품들을 보면서 가톨릭 신앙에 대해 배웠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장면들, 그의 탄생, 공생활, 죽음과 부활을 묘사한 성화들은 특히 더 많은 인기가 있었다.
  작가들은 이 단순한 신자들을 위해 구원의 사건들을 아주 사실적이고도 의미 깊게 표현해 놓았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효과는 계속되고 있고, 특히 성화는 신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데 사용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에 예술가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예술이 필요합니다.” 라고 했다.

성(聖) 예술은 우리의 신앙심과 경건한 신심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성 예술에 대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이 자주 오해하는 점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상이나 성화 또는 예수님과 성모님, 성인들의 어떤 다른 모습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나 국가적인 영웅상을 간직하듯이 이 작품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사진이나 조각상이 실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초상들은 그들이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도와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도 자신들이 깊이 사랑하는 주님과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 성인들을 생각하기 위해 거룩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성(聖) 예술에 그려진 성모님의 모습
  가톨릭 예술의 가장 인기 있는 이미지들 중 하나가 바로 복되신 성모님에 관한 것들이다. 의심할 바 없이 예술가들은 성모자상을 주제로 해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창안할 영감을 받곤 했다.
  미국에서는 어떤 시민 자유 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체국에서도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가 그려진 특별 우표를 발행한다.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진 특별한 작품들은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이탈리아), 체스토호바(폴란드), 필라의 성모님(스페인), 블라디미스의 동정 마리아(러시아), 월싱햄의 성모님(영국)과 로레토의 성모님(이탈리아)의 모습들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특히 교회가 내적, 외적 박해에 직면했을 때에 가톨릭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미지들을 보면서 성모님께 바친 가톨릭적 신심 때문이었다.
  성모님의 이미지를 통한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신자들에게 발현하신 장소와 관련하여 더욱 번성하였다. 파티마(포르투갈). 루르드와 뤼 드 박(프랑스), 녹(아일랜드) 등이 그러한 장소들이다. 신자들은 성모님을 공경하기 위해 그러한 성모 성전들을 방문한다. 또한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도 성모님의 이미지들을 보존하고, 성모님의 모성적 보호와 중개를 청하며 기도한다.

성모님의 이미지에 대한 불경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님의 다양한 모습들과 관련하여 성모님께 대한 여러 가지 신심들을 지속시켜 왔다. 성모님의 기쁨과 슬픔을 공경하는 신심,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 가르멜산의 성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갈색 스카풀라를 착용하는 신심, 기적의 메달을 착용하는 신심들이 그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의 이미지를 공경할 때는 항상 그에 맞는 신앙심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모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영적 어머니이시며 모든 해로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보호자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중재자이심을 안다.
  그래서 성모님의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든 불경하게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경건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모욕이 된다. 그것은 성모님께 큰 불경이 될 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거룩한 아드님께도 불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경에는 그 행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이 필요하며, 불경을 저지르는 자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중재의 기도가 필요하다.

불경을 일으키는 요소들
  때때로 이 불경은 성모님의 이미지를 파괴하거나 절단하거나 참수하거나 스프레이로 칠하거나 태우거나 그 외 다른 방식으로 모독하는 행위로써 나타난다.
  이 모든 행위에는 우리의 보상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이런 모독들은 신비주의자들이 하느님을 모독하기 위해 행하는 일들의 일부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여러 가지 빗나간 이유로 하느님께 몹시 화가 난 사람이 성모님을 모독하여 화풀이를 하는 경우이다. 아주 유명한 성모님의 성화도 몇 세기 동안 이러한 모욕을 받아 손상되었다.
  예를 들면 체스토호바(Czestachowa)의 성모 성화도 이러한 모독을 당한 적이 있다. 이 성화는 나자렛 성가정에서 사용했던 성 요셉이 만든 탁자 위에 모셔져 있는데, 성 루가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1430년 한 떼의 도둑들이 이 고귀한 그림을 훔치려고 했다. 그들은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 마차에 실었는데 마차를 끄는 동물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둑들은 칼로 그 성화를 찢어 없애려 했다. 그러나 성화에 그려진 성모님의 얼굴에 몇몇 칼자국만 남겼을 뿐 성화를 파괴하지 못했다. 나중에 어떤 수도승들이 성모님의 얼굴에 난 상처를 없애가 위해 성화를 수선하려 했으나 놀랍게도 그때마다 그 상처만은 다시 나타났다. 오늘날까지 성화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인 성모님의 위엄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다.
  성모님의 모습을 모독적으로 불경하게 취급하는 또 다른 경우에는 찡그리거나 일그러진 성모님의 모습을 만들거나 성모님의 이미지들을 모독적인 물질로 조형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불경의 예가 된 일은 뉴욕 부룩클린에 있는 미술 화랑에서 일어났다. 성모님의 이미지가 가장 모독적인 물질로 만들어져 외설적인 상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모독은 무신론적이고 왜곡된 반문화(反文化)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고의적으로 행해진 경멸과 모독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많이 존재하는 그런 모독들은 주 예수님께도 큰 모독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분의 어머니를 지독히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죄들에 대한 벌이 클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어머니께 대한 모독에 대해 배상해야 할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성모님의 이미지들을 수치스럽게 변형시키는 사람들의 모독 행위를 배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모님의 이미지를 불경하게 하는 마지막 유형은 기도와 공경을 위해 성모상이나 성화를 모시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본당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있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당을 개조한 많은 교회들은 그들의 거룩한 예술품을 많이 잃어버렸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에 들어가 보면 그곳이 열심한 기도와 흠숭을 위해 세워진 장소라기 보다 오히려 딱딱한 만남의 광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교회들은 이른바 “신성상파괴주의(Neo-iconoclasm)” 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많은 “imagebreaking”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한다.
  7~8세기에 특히 동방 교회에서 종교 이미지들의 사용 여부에 대한 강렬한 반발이 있었다. 종교 이미지 사용을 반대하는 이들은 종교 이미지들을 ‘우상’이라고 외치며 그것들을 파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을 성상파괴자iconoclast 라고 부른다) 그러나 789년의 니체아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종교 이미지는 공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내렸고 파괴된 성화나 성상들을 다시 복구시킬 것을 명했다.
  결국 종교 이미지들은 카타콤바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초대 교회 이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상 가장 유명한 초기 성모님 이미지 중 하나는 성녀 프리실라(Priscilla)의 무덤으로 알려진 로마 카타콤바의 벽에 그려져 있다. 예술 전문가들은 그것이 약 AD 17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이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무릎 위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앉아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습을 공경해야 한다. 우리는 불경한 자들이 성모님께 행하는 불경을 기워 갚기 위해 성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배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모님을 아주 비천한 존재로 취급하고 불경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모독에 대해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는 나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흔히 고의적인 경멸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첫토요일의 신심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 중요한 배상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들을 위해 중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가정에 성화를 모시고 늘 그분의 현존을 기억하여 우리 가정에 성모님의 모성적인 사랑과 돌보심이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묵주기도를 할 때 하느님의 어머니의 성화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한다. 또 가정 순례 성모상을 모시고 각 가정을 봉헌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야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우리가 얼마나 친근하게 모시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앤드류 아포스톨리 신부. C.F.R
– 미국 푸른군대 ‘Soul,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