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에게 신뢰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러나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비록 이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이분들에 대한 판단을 주님이 당신에게만 유보하시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신들도 이를 영하며 이분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직분은 다른 어느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큽니다.”

우리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이토록 엄격한 말씀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이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단히 중대한 일, 핵심적인 관심사에 대한 권고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인은 자기 수도회가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 위에 서 있기를 강력히 원할 때 이런 엄격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지적은
교회로부터 어떤 직분에 불린 인물에 대한 것인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성직자에 대한 판단을 금하다니 이건 성인의 일방적인 견해가 아닐까요? 또한 그들은
어떠한 비판도 받지 않을 정도로 정말 그렇게 숭고한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비록 이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라는 말은 성인이 현실을 냉정하게 보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성인은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또한 숨기지도 않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을 멸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성인의 권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선결되는 물음, 즉 권고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봅시다.

역사적인 배경

성인은 여기에서 성직자에 대해 말합니다. 성직자는 품계를 받은 성직계열에
속한 사람들을 통틀어 말하는데 오늘날이나 그 당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 성인의 시대에는 먼저 실제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을 성직자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교구 사제, 본당 사제들에게 이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 권고에서 보더라도 미사 성제를 주재하고 성체 관리가 위임된 사제들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이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라는 성인의 말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많은 사제들의 품행이 여러 면에서
대단히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직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높은 수입을 위해 지나친 노력을 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성직자들도 생활 보장이 될 정도의 생활비는 받아야겠지만 당시 사제들은 성무 집행이나
그 직책을 재산획득의 수단으로 남용했습니다. 토마스 첼리노는 성인의 전기에서 말합니다.

[성직자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은 돈을 갈망하는가? 돈을 끌어들인 손이 고통으로 변하는 그날 비로소 당신들은 프란치스꼬가 부유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첼리노 84/297쪽)]

그런데 사제들 사이에 만연된 악습은 다만 지나친 수입의 추구와 재산의 부당한 축재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불행한 사례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미사 성제와 성체 관리조차 소홀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중한 죄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하였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축성된 성체를 제 때에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장기간 방치해 두어 벌레가 생기게 하고
벌레들이 성체를 먹게 했습니다. 미사드릴 때 도무지 조심성이 없어서 주님의 성체를 땅에 떨어뜨리고 성혈을 쏟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성체를 방이나 곡간 같은 아무 장소에나 보관하는가 하면, 환자 방문을 가는 길에 지존한
성체가 담긴 성합을 도로변의 가로수에 걸어 두고서 술집에 가기도 했습니다. 공공연히 드러난 죄인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또 합당한 자에게는 영성체를 거절한다거나, 중대한 죄를 범했음을 모든 이가 알고 있는데 그런 상태로 거룩한 미사를
드리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파사우의 고문헌집 242).]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한심스러운
상태의 묘사는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성인이 이분들이 비록 죄인이라고 해도라고 한 말씀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풍조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큰 괴로움을 주었을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영성체는 물론이거니와 미사 성제의 참례마저 매우 저조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떼라노 공의회는 교회법으로 신자들의 영성체와 미사 참례의 최저 횟수를 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규정은 지금까지 계속 유효합니다. 이 공의회는 성직자에게도 사제 직무를 보다 진지하게 수행하기를 촉구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 간에는 사제직을 철저히 거부하는 경향이 농후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 개인 생활의 합당성에 성사의 유효성 여부가 달려 있다는 견해도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어떤
사제가 죄 중에 살고 있다면 그가 집행하는 모든 성사는 한 마디로 무효이고 효력이 없으며, 사제로서 축성된 것과는
관계없이 그 개인의 흠없는 생활이 성사 집행 권한을 좌우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탓할 데 없이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써 모든 권한을 갖게 되며 신품 성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릇된 견해가 이단자들 사이에서 특히 만연하여 품행이 좋지 않은 사제에 대한 논쟁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이들은 사제들의 작은 결점과 실수까지도 드러내어 비웃고 공격하면서 자기들의 오류를 선전하는데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작은 형제회가 취해야 할 태도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갓 창설된 작은 형제회에는 대단히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성인을 중심으로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참작하여 교회는
그들을 사목직에 불러들였습니다. 형제들도 그 당시 교구 사제들의 과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대로
살아가던 형제들에게 교회에서 거룩한 권한과 의무를 부여한 사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가혹하게 비판하려는 유혹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사제답게 살지 않으면 성무 집행의 권리가 없다는 주장에 쉽게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또
그런 사제가 집행하는 성사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동조하려는 움직임도 형제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대단히 민감하게 느낀 성인은 이 점에 대해서 아주 명확히 말합니다.
로마 교회의 관습을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게 신뢰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러나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비록 이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이분들을 판단하는 것을 주님이 당신에게만 유보하시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인은 그 시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던 그런 고지식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오류와 폐단을 아주 분명하게 직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활로 말미암아 자기 사명에 치욕을 가져다주는
죄중에 있는 사제들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들에 대한 판단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유보시키기에
그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성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을 당신의 특별한 직무로 부르셨습니다. 당신 구원의 은총을 인간들에게
베푸실 때 탁월한 방법으로 사제들을 도구로 취하셨습니다. 우선 사제들에게 위탁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특별한 임무를
생각해 봅시다. 사제들에게는 축성과 축복과 권한, 고백성사를 관리할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신비인 미사 성제는 교회에서 오직 사제직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 christi)’
안에서 성체 성사 집행의 전권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사제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고 구속사업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재현과,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와 결합되게 하는 희생의 성찬인 영성체와, 성체 성사적 현존으로 우리를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는 성체 흠숭을 오직 사제직의 직무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합니다. 이 지존한 성체 성사를 이
세상에 있게 하는 사제를 통하여 주님 친히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성인은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확신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역사 하심은 어떠한 인간적인 나약함도, 사제라는 도구의 죄악 때문에도 결코
침해되지 않음을 성인은 잘 알았습니다. 성인은 신앙 생활에서 어떤 도구가 결정적이 아니라 주님과 당신의 역사 하심
그 자체가 결정적임을 익히 알았습니다. 성인은 이 깊은 신앙의 길로 형제들을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깊은 신앙의 자세

사제들에 대한 성인의 자세가 얼마나 철저히 성체께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각인되었는가는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들도 이를 영하며 이분들만이 다른 이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직분은 다른
어느 직분보다 큰 만큼 이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큽니다.

성인은 하느님의 특별한 봉사직에 불림을 받은 사제들이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천상적
영역 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제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 하느님 영역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인은 이런 자신의 신앙 자세를 유언에서 한층 강도 높게 고백하였습니다. [그후
주께서 거룩한 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생활하는 사제들에 대한 큰 신뢰심을 내게 주셨고 또한 주십니다. 만일 그
사제들이 나를 학대한다해도 나는 그분들의 품위 때문에 그분들에게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솔로몬이 가졌던 만큼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뜻을 거슬러 가며 본당에서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분들과 다른 사제들을 나의 주인과 같이 두려워하며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의
죄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들 안에서 다만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볼 뿐이니, 왜냐하면 그분들은
나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들도 성체를 영하고, 또 사제들만이 다른 사람에게 분배하는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우리 눈으로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언 6-9).]

성인은 사제에게 가지는 큰 신뢰심을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보았습니다. 인간 사제에게
주어지는, 즉 모든 인간적인 난관을 극복하도록 해 주는 이 은총을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
뵙습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언 9).] 성인의 이런 믿음은 주님이 사제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사제 안에서 주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가끔 있을 수
있는 사제의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알아 뵈었습니다. 자기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지극히 거룩한 성체의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생각하여 감사드릴 따름이었습니다. 성인이 사제들에게
갖는 큰 신뢰는 그 인간적인 자격이나 탁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신뢰심의 원천은 주님께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적 한계와 결점과 죄도 그분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아 헤매는 영혼에게 가까이
가시려 할 때, 당신 도구의 어떠한 결점이나 죄로도 방해받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비판 대신 긍정적인 도움

성인이 사제들을 이토록 경외한다고 해서, 사제들에게 꼭 해야 할 말을 못하게 막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어느 도시에 가면 제일 먼저 그 도시의 공공연한 장소에서 모인 군중들에게 강론을 하였는데,
그리고 나서 그 도시의 사목자들을 따로 조용히 불러 – 대게 성당 내에서 – 그들이 고쳐야 할 것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을 사목하는 사제와 영적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거룩한 의무를 상기시켜
주는 일을 서슴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또 한편으로 성인은 사제들의 가장 고귀한 의무인 미사 성제를 정성스럽고 주의 깊게
드리지 않는다고 질책만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 안에서 이 고귀한 성사와 사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솔선 수범하여 제병을 구울 좋은 기계를 구입하도록 도와주거나 또 자기
형제들을 본당으로 보내어 질 좋고 합당한 제병을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글라라 성녀와 가난한 자매들이 만든 제대보를
보내주며 여려 가지로 마음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인은 나쁜 상황에 대한 탄식과 신랄한 비판이 가져오는 성과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고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인과 함께, 그 삶을 따르는 생활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확실해졌습니다. 오늘날은 그래도 성인의 시대보다는 나은 상황에서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의 사제들 모두가 완전하고 흠없게 살지는 않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날의 상황이 옛날과
너무 다르다는 점입니다. 요즈음은 사제들이 옛날만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저명 인사가 아니며, 중요한 직책이나
인물로 대접받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정말 부르심의 삶에 철저하지 않으면 사제적 독신 생활의 외로움이 더
가중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제들이 이런 외로움을 건전한 방향으로 극복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사제들은 고독을 마비시키려고,
혹은 삶의 도피처를 찾다가 쉽게 자기 본연의 직무가 아닌 세속적 일에 더 빠져들게 됩니다.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결국 성소의 위기에 빠지거나, 신자들뿐 아니라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찬성할 수는 없더라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감싸주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 우리 시대가 가져온 특별한 어려움을 언급하겠습니다. 전례 개혁은 미사와
성무 집행에 있어서 옛날에 비해 참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다양화와 변화를 기치로 내걸고 전례의 많은 부분을 사제가
융통성 있게 활용하도록 합니다. 미사도 단순한 형식에 묶이지 않고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도록 사제의
창의성 발휘가 많이 허락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항상 원하는
대로 잘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제들은 이 허용범위를 지나치게 벗어나 신자들을 경악하게 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전례 지침과 사목 지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식대로 사목합니다.

다른 일부의 사제들은 교회에서 개혁한 전례를 무시하고 옛 전례만을 고집합니다.
이들은 일부 신학자들의 이론에 힘입어 자기들의 주장이 교회의 지침과 가르침보다 더 옳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제들은
겉으로는 할 수 없이 교회의 지침을 따르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현대 교회의 신학과는 동떨어진
자기 주장을 고집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교회의 전례 규범을 무시하는
사제에게 공손히 상기시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미사와 전례 때에도 우리 입맛대로가 아니라, 교회에 순명함으로써
사제 직무가 더 큰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을 그 사제가 깨닫고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강론의 위치가 높아진 오늘날, 이 분야에서 겪는 사제들의 어려움도 적지 않습니다.
사제들 모두가 강론의 은사를 받을 수는 없고, 비록 사제들이 높은 성덕과 학식을 지녔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묵상한
바를 모두 좋은 어법이나 표현으로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성과 한계를 체험하듯 사제 역시 이런 분야에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글라라 성녀의 태도에서 우리는 좋은 가르침을 찾아봅니다. [성녀는 모든 강론에서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것을 찾아내곤 하였다. 왜냐하면 성녀는 가시덤불에서 좋은 꽃을 따내는 것이 좋은 나무의 열매를
따는 것 이상으로 지혜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성녀 글라라의 전기 37).] 성녀는 다른 이의 인간적 한계성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께 분별의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이 점을 글라라 성녀에게서 배우도록 합시다.

또 고백 사제로서의 역할을 어떻습니까? 그들이 이 직무 수행에서 야기되는 숱한
어려움은 뒤로 하더라도 신자인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불만이 그들을 더 어렵게 합니다. 모든 사제가 우리에게 알맞은
훈시를 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영적 생활에 지장을 주는 듯이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사제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시는 분이 곧 당신이라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사석에서나 공동체 내에서 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극히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제의 활동은 그의 명성에 크게 좌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가 듣고 있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 자체로서 벌써 주위에 좋지 않은 빛을 던집니다.

성인과 같은 공경심으로 사제를 대하는 자세는 이 어려운 시대에 사제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사제들은 우리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기쁨에 찬 가난’ (도서출판 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