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예수께서 오래 당신 생각에 잠겨 계실 수가 없다. 요한과예수의 사촌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가 열성당원 시몬과 함께 예수께로 와서 야산 위에서 보는 전경에 예수의 주의를 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눈에 띄게 침울하시기 때문에 아마 예수의 기분을 전환시킬 생각으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지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기시킨다. 아스칼론으로 간 여행… 예수께서 가말라와 야곱의 늙은 아버지의 눈을 다시 보게 하신 사론평야의 농부들의 집… 가르멜산으로 예수와 야고보가 피해 들어갔던 일… 해항 가이사리아와 젊은 여자 갈라… 신디카와의 만남… 요빠의 이방인들… 모딘 근처의 도둑들 아리마태아의 요셉의 집에서 있은 추수의 기적… 이삭 줍는 작은 노파… 그렇다. 기쁘게 하고 싶은 모든 일이다…. 그러나 그 일들 가운데에는 모두에게 또는 예수께만 눈물과 고통의 추억이 섞여 있다. 사도들 자신이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중얼거린다. “정말이지 이세상의 일에는 어디에나 고통이 있어. 세상은 속죄하는 곳이야….” 그러나 마침 안드레아도 제베대오의 야고보와 함께 이 집단에 합류하였었는데, 그가 이렇게 지적한다. “죄인인 우리들에게는 정당한 법칙이지만, 선생님께는 왜 이다지도 고통이 많은 건가?”
조용한 토론이 일어나서, 이 사람들의 목소리에 끌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집단과 합류할 때까지 그대로 계속된다. 소박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생님의 목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면서 가르치느라고 분주한 가리옷의 유다만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되고 허식적인 모방으로 열과 확신이 들어 있지 않다. 그 말을 청중이 직설적으로 유다에게 하기까지 하니, 유다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들이 아둔해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지혜의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져 줄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들을 그대로 놔두겠다고 언명한다. 그러나 소박한 사람들이 모욕을 느끼면서 자기들은 “짐승이 사람보다 못한 것처럼 그보다 못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정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예수께서 열한 사도가 말하는 것을 건성으로 들으신다. 그것은 유다가 말하는 것을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데, 당신이 들으시는 것이 틀림없이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 잠자코 계신다. 마침내 바르톨로메오가 죄없는 예수께서 왜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관점을 내놓아 직접 관심을 기울이시게 한다.
바르톨로메오는 말한다. “제 생각으로는 사람이 착한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죄있는 사람, 즉 대부분의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부분의 사람은 죄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기의 유죄성이 자기의 악습들과 더불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홧김에 착한 사람을 괴롭게 해서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선생님이 선생님의 완전과 저희들의 무가치함 사이의 대조로 인해서 괴로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선생님을 조금도 업신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완전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고통스러운 혐오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은 똑같이 고통을 당하실 것입니다”하고 타대오가 말한다.
“이와 반대로, 제 생각에는 선생님이 역시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선생님의 원수들에 대한 선생님의 인성의 격분을 선생님의 초자연적인 부분으로 억제하셔야 하는 노력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 같습니다”하고 마태오가 말한다.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 생각은 분명히 틀린 생각이겠지만,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선생님의 사랑이 배척당하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하신다고 말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적인 면이 바랄 수 있을 것처럼 벌할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선을 행하실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하시는 것입니다”하고 안드레아가 말한다.
“끝으로 저는”하고 열성당원이 말한다. “선생님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은 모든 고통을 보상하기 위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선생님 안에서는 두 가지 성 중의 하나가 우세하지 않고, 그 두 가지 성이 선생님 안에 똑 같이 있고 완전한 조화로 결합해서 완전한 희생을 이루는데, 그 희생이 하도 초자연적이어서 천주성에 대해서 한 모욕을 가라앉히는 힘을 가질 수 있고, 하도 인간적이어서, 인류를 대표해서 그 인류를 최초의 아담의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도로 데려가 과거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낳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에 맞는 새로운 인류, 즉 실제로 하느님의 모습이 있고, 하느님과의 닮음이 있고, 사람의 운명, 즉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을 차지함과 하느님을 차지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인류를 새로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초자연적으로 고통을 당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시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선생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모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선생님은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으로 인하여 해독을 입은 저희 육체의 음란을 눌러 부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십니다. 두 가지 완전한 성(천주성과 인성)의 완전한 고통으로 선생님은 하느님께 지은 죄와 사람의 죄를 완전히 없애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신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너희들 생각에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정의이냐?”
어떤 사람들은 이 의견을 지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 의견을 지지한다. 알패오의 야고보만이 요한과 같이 잠자코 있다.
“그럼 너희 두 사람은 아무 의견에도 찬성하지 않는 것이냐?” 하고 예수께서 그들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말씀하신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모든 의견에서 참된 것을 조금 또는 많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더 참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찾아낼 줄을 모른단 말이냐?”
“어쩌면 요한과 저는 그것을 찾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은 거의 하느님을 모욕하는 일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훌륭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거의 하느님의 이름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선택된 민족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이 말하자면 복되신 이름을 입에 내서 말할 수가 없어서 대용하는 용어로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사탄이 감히 하느님께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희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저희들은 선생님이 하느님이시고 사탄이 선생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고통이 선생님께 대해서 끊임없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사탄은 선생님을 누구보다도 더 미워합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증오를 만나시는 것입니다”하고 야고보가 말한다.
“그렇습니다”하고 요한이 말한다. “선생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증오를 만나십니다. 선생님께 고통을 드리려고 몸을 일으키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라삐들도 아니고, 이 사람이나 저 사람도 아니고, 이것 때문이나 저것 때문에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사랑으로 증오에게서 너무나 많은 희생물을 빼앗아 오시기 때문에, 증오가 사람들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들을 증오로 새파랗게 된 얼굴로 선생님께 맞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정의에 아직 한 가지가 빠졌다. 가장 참된 이유를 찾아보아라, 내가 그 때문에 존재하는 이유를…” 하고 예수께서 그들을 격려하시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들은 곰곰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가 단념하고 말한다. “저희는 찾아내지 못하겠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항상 너희들 앞에 있다. 우리 성경 말씀과 우리 역사의 상징들 속에서 울리고 있다…. 자, 찾아보아라! 너희들의 모든 정의에 참된 것이 들어 있다. 그러나 첫째 이유가 빠졌다. 그것을 찾아보아라, 현재에서가 아니라 가장 먼 과거에서. 예언자들 이전에, 성조들 이전에, 우주의 창조 이전에….”
사도들은 곰곰 생각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미소 지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말을 기억하면, 그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너희는 아직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기억할 것이다. 잘 들어라. 우리 함께 세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자 시간의 한계에까지. 누가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켰는지 너희는 알지. 사탄, 뱀, 적수, 원수, 증오이다. 너희들 좋을 대로 불러라. 그러나 그가 왜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켰느냐? 큰 새암 때문이다. 제가 쫓겨난 하늘에 사람이 가기로 되어 있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는 새암이다. 사탄은 그가 받고 있는 유형(流刑)을 사람에게도 받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왜 쫓겨났었느냐? 하느님께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은 너희도 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반란을 일으켰느냐? 순종 때문이다. 고통의 시초에는 불복종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기쁨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는 완전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논리적인 것이 아니냐? 순종하는 것은 특히 중대한 문제인 경우에는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하느님의 아들들에게 기쁨을 다시 가져다주기를 원하면, 하느님의 생각에 대한 순종을 하기 위하여 무한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사랑이 내게 요구했겠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므로 나는 이기기 위하여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죄 하나나 천개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루치펠의 천사적인 정신에서나 아담에게 생명을 주던 영에서나 항상 하느님께 대한 불복종의 죄였고,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항상 하느님께 대한 불복종의 죄일 전형적인 의미의 죄 자체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인 너희들로서는 너희 순종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그 얼마 안 되는 것에 -너희들에게는 아주 큰 것으로 보이지마는 아주 얼마 안 되는 것인-한정되게 되어 있다. 당신 정의로써 하느님께서는 너희들이 드릴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하신다. 너희들은 하느님의 뜻들 가운데에서 너희들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안다. 그러나 나는 큰 사건에 대해서나 가장 작은 사건에 대해서나 하느님의 생각을 완전히 알고 있다. 내게는 앎과 실행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 사랑 가득한 제물봉헌자인 숭고한 아브라함은 제물과 아들을 아끼지 않는다. 충족되지 않고 모욕을 당한 사랑이 속죄와 제물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천만 년을 산다 하더라도 내가 (사람)을 그 마지막 심금(心琴)까지 태워버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영원으로부터 내가 천주 성자로서 또 (사람)으로서 내 아버지께서 옳다고 생각하셨을 순간에 순종할 뜻을 가지고 아버지께 ‘예’하고 말씀드리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종은 고통과 영광이다. 순종은 영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죽지 않는다.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말 한다마는,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들과 세상과 사탄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을 한 뒤에야 그렇게 될 것이다. 순종은 빛이다. 순종하면 할수록 더 비춤을 받고 더 분명히 본다. 순종은 참을성이다. 그래서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사물과 사람들을 더 잘 참아 견딘다. 순종은 겸손이다. 그래서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이웃에 대해 더 겸손하게 된다. 순종은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랑이다. 그래서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사랑의 행위가 더 많아지고 더 완전하게 된다. 순종은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정신의 영웅은 성인이고, 하늘나라의 시민이며, 신격화된 사람이다. 사랑이 한 분이시고 세 위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덕행이라면, 순종은 너희들의 선생인 나를 만나는 덕행이다. 거룩한 모든 것에 대한 순종으로 세상이 너희들을 내 제자로 알아보게 하여라. 유다를 불러라. 유다에게도 할 말이 있다….”
유다가 달려온다. 예수께서는 내려오는데 따라서 점점 더 좁아지는 전경(全景)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신다. “장차 정신의 선생들이 될 너희들에게 작은 비유 하나를 말하겠다. 너희들은 어렵고 힘든 완전의 길을 더 올라갈수록 더 분명하게 볼 것이다. 맨 처음에 우리는 많은 마을이 있고, 밭과 과수원들이 있는 펠리시테인들의 평야와 사론평야 이렇게 두 평야를 보고, 큰 바다인 먼 곳의 파란 빛깔과 저쪽에 있는 아주 초록색인 가르멜산까지 보았었다. 이제는 별로 보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지평선이 좁아졌고, 또 점점 더 좁아져서 마침내 계곡 아래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내려가는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의 덕행과 지혜가 점점 더 제한되고, 그의 판단력이 점점 더 좁아져서 마침내 없어지게까지 된다. 그러면 정신의 선생은 그의 사명이라는 면에서는 죽은 것이다. 그는 이제 식별을 못하게 되고, 인도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시체와 같아서, 자기가 썩은 것과 같이 부패시킬 수가 있다. 내리받이는 어떤 때, 아니 거의 언제나 그를 끌어당긴다. 그가 아래에서 관능적인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휴식과 음식을 얻기 위해서 계곡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육체를 위하여는 필요한 것이지만, 윤리적 정신적 관능성의계곡에 내려감으로써 관능적인 욕구와 정신의 게으름을 만족시키는 것은 필요치 않다. 내려가도 되는 계곡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겸손의 계곡이다. 그러나 겸손한 영을 잡아 당신께로 올리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그 계곡으로 내려모신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들어 올림을 받을 것이다. 다른 계곡은 어느 것이든 하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를 부르셨습니까, 선생님?”
“이것 때문이었다. 너는 질문하는 사람들과 말을 많이 했지.”
“예,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새보다도 더 머리가 둔합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그곳에 생각 하나를 집어넣고자했다. 네가 네 정신에 영양을 취할 수 있게 하려고.”
유다는 어리둥절해서 예수를 쳐다본다. 그는 그것이 선물인지 또는 꾸지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을 따라 오던 사람들과 가리옷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다에게 그의 교만을 꾸짖으신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유다는 화제를 조심스럽게 다른 데로 돌리는 길을 택하여 묻는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로마인들이 페트라의 그 사람처럼, 선생님의 가르침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과 아주 한정된 접촉을 가진 그 사람들이 말입니다. 또 저 알렉산데르는요? 그 사람은 갔고… 우리는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요전의 로마인들도 그렇구요. 그들 안에는 진리에 대한 본능적인 탐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교주의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좋은 결과를 끌어내게 되는 때가 있을까요?”
“진리를 발견한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왜 그들이 성공하게 되지 못한단 말이냐?”
“그들은 죄인이니까요.”
“죄인은 그들밖에 없느냐? 우리 가운데는 죄인이 없느냐?”
“많습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 말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여러 세기 전서부터 벌써 지혜와 진리로 키워진 우리가 죄인이어서, 의인이 되고, 선생님이 나타내시는 진리를 따르기에 이르지 못하는데, 부정이 가득 차 있는 그들이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진리에 이르기 위한 그의 출발점이 어디이든, 진리, 즉 하느님께로 올 수 있고 차지하기에 이를 수 있다. 정신의 교만과 육체의 타락이 없고, 진리와 빛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있고, 순수한 의향이 있고,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있을 때에는 인간이 확실히 하느님의 길에 있는 것이다.”
“정신의 교만… 과 육체의 타락… 선생님… 그러면….”
“네 좋은 생각을 계속해라.”
유다는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타락한 사람들이니까 하느님께로 갈 수 없군요.”
“유다야, 네가 말하려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네 생각과 네 양심에 재갈을 물렸느냐? 오! 사람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런데 가장 큰 장애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자기의 결점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그 자신에게 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정신적인 파멸의 원인을 모두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사탄을 중상하는 일도 매우 많다. 또 모든 사건을 하느님께 돌림으로써 하느님을 중상하는 일은 훨씬 더 많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신다. 사탄은 선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의지를 이기지는 못한다.
나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백에 일흔 번을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 사람이 죄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성찰하기를 싫어하고, 비록 그의 양심이 뜻하지 않은 충동으로 들고 일어나 그가 묵상하고자 하지 않은 진리를 외친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고, 엄하고 고민하는 그의 지성 앞에 마주서는 이 충고를 없애버리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불어넣어주는 그의 생각을 변질시키려고 애쓰며,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정신의 교만과 육체의 타락을 가졌기 때문에 진리에 이를 수가 없구나’하고. 그렇다. 사실,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정신의 교만과 육체의 타락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행동이 사람들이나 당파의 이익에 반대 될 때에는 하느님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방해할 정도로 사탄의 교만과 견줄 수 있는 교만이다. 그리고 이 죄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영원한 벌을 받는 사람을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착한 사람들이 아직 모든 계급에 있다. 유식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보다는 보잘것없는 일반 서민들 가운데에 더 많이 있다. 그러나 있기는 있다. 얼마나 되느냐? 내가 근 3년째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은혜를 베풀고, 그들을 위하여 내가 기진맥진한 팔레스티나의 이 민족에 비해서 얼마나 되느냐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내 나라에 오기를 결정한 사람보다는 구름낀 밤에 보이는 별이 더 많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저 이방인들은 선생님의 나라에 올 것입니까?”
“다는 아니지만 많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내 제자들 가운데에도 모두가 끝까지 꾸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햇볕에 타서 가지에서 떨어지는 열매들은 걱정하지 말자! 할 수 있는 한, 온유와 굳셈, 나무람과 용서, 참을성과 사랑으로 그 열매들을 타지 않게 하도록 힘쓰자. 그런 다음 그들이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싫소’하고 말하면서 뉘우치지 않고 죽어서 죽음과 사탄의 품으로 뛰어들면, 고개를 숙이고, 그 영혼의 구원이라는 기쁨을 하느님께 드리지 못한 데에서 오는 우리의 고통을 하느님께 드리자. 선생은 누구나 이런 실패를 체험한다. 그리고 이 실패들은 영적인 선생들의 교만을 꺾고, 그들의 임무에 꾸준한지를 시험하는데 소용되기도 한다. 실패가 영적인 교육자의 의지를 싫증나게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장래에는 더 많이 더 잘 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왜 십인대장(十人隊長)에게 어떤 산에서 그를 다시 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떻게 그 일을 아십니까?”
예수께서는 유다를 이상한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신다. 그 눈길에는 슬픔이 미소에 섞여 있다. “내가 높이 올려질 때에 그가 그곳에 있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박사에게 뼈아픈 진리의 말을 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빛을 향한 확실한 전진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가바온에 다 왔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 일곱 명과 같이 가서 내가 간다는 것을 알려라. 나는 나를 따라 오는 이웃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위하여 즉시 말을 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유다야, 너는 마태오와 시몬과 바르틀로메오와 함께 남아 있어라.”
(나는 십인대장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때 있었던 병사들 중의 어떤 사람으로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내 예수를 살펴보는데 전념하여 그들을 많이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말도 해야 하겠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임무가 맡겨진 한 떼의 병사이었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더 잘 살펴볼 수 있었을 때에는 빛이 너무 약해서 아주 잘 아는 얼굴들만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내 생각에는 그가 가믈리엘에게 어떤 말을 한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지금 기억하지는 못하겠고, 또 내가 지금 혼자 있어서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쓴 공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