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빌라도와 나의 만남에 관계되는 대목을 네게 묵상하게 하고자 한다.
  요한이 거의 항상 현장에 있었거나 적어도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증인이고 증언하는 사람이다. 요한은 내가 어떻게 가야파의 집에서 나와 총독 관저로 끌려 갔는지를 이야기 한다. 그는 ‘이른 아침’이라고 밝혀 말한다. 사실 너도 본 것과 같이 겨우 날이 새기 시작했었다.
  그는 이렇게 명확히 밝혀 말한다. ‘그들은(유다인들) 부정을 타서 과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까봐 총독 관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위선자인 그들은 이교도의 집의 먼지를 밟음으로 부정을 탈 위험이 있다고는 생각하였지만, 무죄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를 완수한 것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과월절 음식을 한층 더 맛있게 맛볼 수 있었다.
  지금 저들을 본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속으로는 악을 행하면서 겉으로는 종교에 대한 존경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공언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저들을 닮았다. 틀에 박힌 말투, 말투뿐! 참된 신앙이 없다! 그들은 내게 혐오와 분개를 일으킨다.
  유다인들이 빌라도의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므로 빌라도가 고함을 지르는 군중이 무슨 일로 그러는지 들으려고 나왔다. 다스리는 일에나 재판하는 일에는 이력이 나 있었으므로, 그는 한 번 척 보아서 죄인은 내가 아니라 증오로 인하여 어쩔 줄 모르는 군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 눈길의 만남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판단했고, 그 사람도 나를 있는 그대로 판단했다. 내 안에는 그 사람이 마음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고, 그 사람에게는 내가 무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다. 그 사람은 처음 순간부터 나를 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악인들에 대하여 사법권을 행사하는 권리가 오직 로마에만 주어졌고 확보되었기 때문에 그는 ‘당신들의 율법에 따라 저 사람을 재판하시오’하고 말함으로써 나를 구하려고 해보았다.
  두 번째로 위선자인 유다인들을 선고를 내리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령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도 로마가 여전히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이 로마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선고를 내리고 형을 집행하였다. 사랑은 하지 않지만, 미워하고 두려워하기는 하던 내게 대하여는 – 그들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메시아일 경우를 생각해서 나를 육체적으로 죽이기는 원치 않았다 – 달리 행동하였고, 로마가 나를 재판하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를 로마의 권력에 대항하여 봉기를 선동하는 자라고 고발하였다. 너희들 같으면 ‘반역자’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치스러운 회의실에서, 그리고 내가 임무를 수행한 3년 동안에 여러 번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라고 나를 비난하였으며, 나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돌에 맞아 죽었거나 어떻든 죽임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그로 인하여 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죄악을 물리적으로 저지르지 않으려고 나를 악인과 반역자로 고발함으로써 로마로 하여금 그 죄악을 완수하게 하였다. 군중이 타락하고 우두머리들이 사탄일 때에는 그들의 잔인성과 찬탈의 열정을 발산하기 위하여 무죄한 사람을 고발하고, 장애물과 비탄을 나타내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돌아갔다. 세상은 가끔, 항상 타락한 사상의 배태기를 거쳐 이러한 타락의 표시로 폭발한다. 군중은 마치 전체가 임신 상태에 있는 것처럼 제 태에서 이 괴물을 야수와 같은 주의로 기른 다음, 잡아 먹으라고, 우선 더 나은 사람들을 잡아먹고 그 다음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으라고 세상에 내놓는다.

  빌라도는 관저 안으로 돌아와 나를 가까이로 불러 가지고 말을 물어본다. 그는 내게 대한 말을 벌써 들었었다. 그의 백부장들 중에는 감사의 정이 깃든 사랑으로, 눈에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마음 속에는 미소를 품고 내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를 자선가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독에게 보고를 할 때면, 많은 군중을 끌어당기고 이교도의 정신 상태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왕국에 대하여 말하며 새 교리를 전파하는 그 예언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은 항상 내가 온유하고 착한 사람이며 이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당국자들인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차근차근 가르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착실한 그들은 진리를 보았고 진리를 편들어 증언하였다. 그 전 주일, 군중의 외치는 소리에 끌려서 빌라도는 길까지 나와 무장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버린 암나귀를 타고 어린이들과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강복을 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었다. 그는 그 사람 안에 로마에 대한 위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왕인지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의 빈정거리는 이교적인 회의주의를 가지고, 나귀를 타고 가는 그 왕권, 조신(朝臣)으로는 어린이들과 여인들과 서민들이나 가진 그 왕권, 3년 전부터 재물과 권력에는 매력을 느끼지 말라고 설교하고 정신과 영혼의 정복이 아닌 다른 정복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그 왕권을 좀 놀려먹고 싶었던 것이다. 이교도에게 영혼이란 무엇이냐? 그들의 신들까지도 영혼이 없다. 그러니 사람이 영혼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은 또 왕관도 궁궐도 조정도 군사도 없는 그 왕이, 그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말은 아주 사실인 것이 아무 신하도 아무 군대도 그들의 왕을 옹호하고 적에게서 그를 빼앗아가려고 일어나지 않는다. 빌라도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를 유심히 살핀다. 내가 그에게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의 마음에서 인간적인 근심과 그의 직책의 오만과 이교의 오류를 떨쳐버리면 내가 누구인지를 즉시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창문을 막고 있는 그 곳을 어떻게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있겠느냐?
  아들아,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하느님과 빛의 자리가 없어진 그곳, 문과 창문들이 교만과 인간성과 악습과 폭리, 그리고 하느님께 대항하여 사탄을 섬기는 그 많은 관리자들로 꽉 막혀 있는 그 곳에 하느님과 빛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느냐?

  빌라도는 나의 왕국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내가 그것을 설명해 주기를 청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알라고 내가 권하는데도 고집이 센 이교도인 그는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말하고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질문을 집어치운다.
  오! 아들들아! 내 아들들아! 지금의 빌라도들아! 너희도 본시오 빌라도와 같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어깨를 들썩하면서 집어치운다. 그 질문들은 너희들에게 쓸데없는 것으로, 시대에 뒤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이냐? 돈이냐? 아니다. 여자들이냐? 아니다. 권력이냐? 아니다. 육체의 건강이냐? 아니다. 인간적인 영광이냐? 아니다. 그러면 집어치워라. 진리는 망상을 쫓아다니는 것 같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다. 돈, 여자, 권력, 건강, 안락, 명예, 이런 것들이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도달해야 하는 구체적이고 유익한 물건들이다.
  너희들은 이렇게 추론한다. 그리고 에사오보다도 더 나쁘게 영원한 복락을 너희들의 육체의 건강에도 해롭고 너희들의 영원한 구원에 해가 되는 거칠은 음식과 맞바꾼다. 왜 너희들은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꾸준히 묻지 않느냐? 진리는 자기에 대하여 너희를 가르치기 위해 알려지기만을 요구한다. 진리는 빌라도에게와 같이 너희들 앞에 있으며 간청하는 사랑의 눈으로 너희를 바라보고 너희에게 애원한다. ‘내게 물어보아라. 가르쳐 줄 터이니.’ 내가 빌라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너는 보았겠지? 너희들 모두를 그렇게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청하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애통하는 사랑의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사랑이 나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랑, 언제나 사랑이다.
  빌라도는 내게 더 물어보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 내버려둔 채, 더 큰 소리로 말하고 그들의 폭력으로 그들의 의견을 강요하는 나쁜 사람들을 보러간다. 그래서 내 말을 듣지 않고 진리를 알라고 한 나의 권고를 어깨를 들썩하며 물리친 그 불행한 사람이, 그들의 말은 귀담아 듣는다. 그는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상숭배는 그 형태가 어떠하던지 항상 어떠한 거짓말이라도 존중하고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약한 사람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거짓말은 약한 그 사람을 죄악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빌라도는 죄악의 문턱에서 아직도 한두 번 나를 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나를 헤로데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그는 로마와 그의 백성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는 교활한 왕이 로마의 감정을 해치지 않고 또 유다 백성들의 감정도 해치지 않도록 행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약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취할 힘이 없다고 느끼는 결정을, 소요가 가라앉기를 희망하면서 몇 시간 동안 늦추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의 말은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하여라.’ 그러나 빌라도는 그 말을 듣지 못하였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 그 말을 그에게 옮겼다 하더라도 늘 하는 대로 어깨를 들썩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승리하고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하여는 양식(이 말은 인간적인 상식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라)이 권하는 데 따라 예라고 할 것을 아니라고 하고, 아니라고 할 것을 예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20세기에는 빌라도가 얼마나 있는가? 진리에게, 또 진리를 위하여 예라고, 끊임없이 예하고 말하며, 거짓말에 대하여는 아니라고, 끊임없이 아니라고 말하던 그리스도교의 영웅들은 어디 있느냐? 강철과 같은 힘과 침착한 민첩으로 지체없이 위험과 사건들을 무릅쓸 줄 아는 영웅들은 어디 있느냐? 왜냐하면 ‘그러나’ 라는 말과 ‘만일’ 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선은 즉시 행해야 하고 악은 즉시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헤로데에게서 돌아왔을 때 빌라도의 새로운 타협이 나왔다. 채찍질이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희망하였던가? 군중은 피를 보기 시작하면 더 사나와지는 야수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는가? 그러나 나는 너희의 육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부수어져야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부수어졌다. 내 육체의 한 부분도 맞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이사야가 말하는 그 사람이다. 그리고 명령된 고문에 이어, 명령되지 않은 고문, 인간의 잔인성이 만들어낸 고문인, 가시가 덧붙여졌다.
  사람들아, 너희들의 머리, 그 속에서 부글부글 곪고 있는 그 많은 죄에서 너희를 구해 주기 위하여 고통의 왕관을 쓴 너희들의 구세주, 너희들의 왕이 보이느냐? 너희들 대신, 행위로 변하는 점점 더 잔인한 너희들의 생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나의 무죄한 머리가 당한 고통을 곰곰이 생각하느냐? 이유가 없을 때에도 기분이 상하는 너희들은 빈정거리는 찢어진 진홍색 망또를 걸치고 갈대 왕홀을 들고 가시관을 쓴 모욕을 당한 왕을 보아라.
  그 왕은 하느님이시다. 그는 벌써 죽어가는데, 그들은 그래도 그를 손과 조롱으로 채찍질한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거기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계속 주먹을 휘두르며 외친다. ‘밖으로, 밖으로 끌어내시오!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 다른 하느님이 없소’ 하며 하느님을 숭배하지 않고, 너희들 자신을 숭배하며, 너희들 가운데에서도 권력을 남용하는 자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아,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의 죄악에 관하여 그는 너희를 돕지 않는다. 사탄이 더 남의 일 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너희는 사탄을 더 낫게 여긴다. 너희는 빌라도와 같이 사람의 아들을 무서워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권능으로 너희를 제어하는 것을 너희가 느끼고, 그의 이름으로 너희를 비난하는 양심의 소리로 움직이는 것을 너희가 느끼는 때에, 너희도 빌라도와 같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너희는 안다. 나를 부인하는 사람들까지도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 거짓말하지 마라. 2천년이 나를 둘러 싸고 있고 내가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설명하며 내 기적들을 알려 준다. 빌라도는 더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너희의 믿음을 지탱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으로 20세기에 걸친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도 빌라도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대해서보다 더 엄하였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희들하고는 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에게 나라는 것을, 또 너희가 나를 흠숭하고 내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지금도 너희는 내가 너희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바로 내가 너희들의 자아를 망친다고 비난한다. 너희는 이 때문에 너희의 믿음을 잃는다고 말한다. 오! 거짓말장이들!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들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 도대체 너희는 언제 기도를 하고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 너희가 고위층 사람들이냐? 너희가 그러하면 내가 허락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너희가 군중 속의 무명씨들이냐? 나말고 다른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아무도 나보다 더 낫지 못하고 나보다 먼저 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게 바쳐야 할 그 사랑의 예배를 바쳐라. 그러면 너희들의 청을 들어주마. 너희는 사생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겠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고 한없는 채찍질 후에는 내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빌라도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최후의 시도를 해본다. 그는 나를 군중에게 내보이며 ‘이 사람을 보시오!’하고 말한다. 내가 인간적으로 가엾어 보이는 것이다. 그는 군중의 동정에 희망을 건다. 그러나 저항하는 냉혹과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 초자연적으로 옳은, 따라서 훌륭한 행위를 완수하여 ‘저 사람은 무죄하니까 그를 석방하오, 죄가 있는 것은 당신들이오. 그리고 만일 당신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로마의 준엄을 맛볼 것이오’하고 말할 줄을 모른다. 나중에 그로 인하여 그에게 올지 모르는 화를 계산하지 않는 공평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참으로 착한 사람은 아니다. 착한 사람은 론지노이다. 그는 총독보다 힘이 덜하고 덜 보호받는 처지이지만, 길 가운데에서 얼마 안되는 병사와 적의를 품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감히 나를 옹호하고 도와주고 휴식을 주며, 독실한 여자들과 더불어 나를 위로하고, 키레네 사람의 도움을 받게 하고, 끝으로 십자가 아래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그 사람은 정의의 영웅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웅이 되었다.

  너희들의 물질적인 재물만을 걱정하는 인간들아, 하느님께서는 너희들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발신물인 정의에 충실함을 보시면 너희들의 물질적 재물의 필요를 위하여도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아라. 나는 공정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항상 상을 준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도와준다. 나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물 한 잔을 주는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하고 말한 그리스도이다. 나에게 사랑을 주고 하느님으로서 박해받는 사람인 나의 입술을 축여 줄 물을 주는 사람에게는 나 자신을, 곧 보호와 강복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