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가 말씀하신다.
  “내 말이 벌써 하나의 교훈이기 때문에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에 대해 아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남편에 대한 친절, 동정, 애정 넘치는 배려, 위로 따위 모든 것인 이 사랑을 가지지 않은 여자들의 잘못으로 너무나 많은 결혼이 파경에 이른다. 남자에게는 여자에게처럼 무겁게 지워진 육체적인 고통의 짐이 지워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정신적인 걱정이 지워져 있다. 일할 필요, 취해야할 결정, 법에 의하여 정해진 권력과 자기 가족 앞에서 져야 하는 책임 따위‥‥ 아아! 남자를 무겁게 찍어누르지 않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리고 그도 역시 얼마나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느냐! 그런데 이기주의가 극도에 달하여, 피로하고 낙담하고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걱정이 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쓸데없고, 또 때로는 옳지 못한 그의 불평의 짐을 보태 준다. 이 모든 것은 아내가 이기적이기 때문이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거나 자기 자신의 타산적인 만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수성과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케 하는 것이며, 그가 바람과 평화의 하늘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있기 위하여 필요한 도움을 그의 정신에 주는 것이다.
  너희들의 주의를 끄는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거기 대하여는 이미 말하였지만 강조한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신뢰는 그 안에 향주덕을 요약한다. 신뢰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을 전제한다.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바라고 그 사람을 믿는 것, 이것이 신뢰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뢰가 그래야 하는 그런 신뢰를 받으실 자격이 있다. 거기에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신뢰하는데, 우리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왜 신뢰를 하지 않겠느냐?
  신뢰는 또한 겸손이기도 하다. 교오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 만족한다. 내가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이 능력이 없고, 거짓말쟁이이고, 주제넘기 때문이다‥‥’ 하고.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을 믿는다. 왜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겠는가? 왜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야 하겠는가?’ 하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하여는 한층 더 옳게 이렇게 말한다. ‘왜 내가 착하신 그분을 의심해야 하는가? 왜 내가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당신을 주시고, 교오한 사람에게서는 멀리 떠나신다.
  신뢰는 또 순종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순종을 사랑하신다. 순종은 우리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어떤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인 때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고 완전한 아버지이시다.
  너희들이 묵상하기를 내가 원하는 세째 점도 역시 신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무 사건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네가 권력자이냐?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네가 권력에 굴복하느냐? 그것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자야, 네 권력을 가지고 재난을 만들지 않도록 힘써라, 비록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재난이었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너의 재난’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해도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는 않고, 만일 네가 한계를 지나치면 하느님께서 너를 치시고 너를 부수시기 때문이다. 한편 단순한 신민인 너는 네 처지인 그 처지를 가지고 하늘의 보호를 네게 끌어오는 자석을 만들도록 힘써라. 그리고 절대로 저주를 하지 말아라. 저주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의 피조물에게 축복하든가 그들을 저주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그분이 하실 일이다.
평안히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