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가 말씀하신다.

  “내가 창백해진 것을 아무도 부정확하게 해석하지 말기 바란다. 그 창백함은 인간적인 공포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내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예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두려움의 동기는 아니었다. 나는 요셉의 고통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요셉이 나를 고발했으리라는 생각까지도 그 자체로는 나를 당황하게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고발할 마음을 굳힘으로써 요셉이 사랑을 어기게 되리라는 것이 내게 불쾌하였다. 내가 요셉을 보았을 때 내 피는 이 때문에 오직 한번 뛰었을 뿐이다. 그때야말로 한 의인이 사랑을 어김으로써 정의를 모욕할 수 있었을 순간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사랑을 어기지 않던 의인인 그가 사랑을 어긴다면, 그것은 내게 극도의 고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내가 요셉에게 말한 것과 같이 만일 내가 겸손을 그 최후의 한도까지 이끌어 가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교만을 지워버리기 위하여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시는 그분을 내 안에 잉태할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 복음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 광경을 네게 보여 준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이 마음 속에 끊임없이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들을 너무 외면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믿음. 요셉은 하늘나라의 사자의 말을 무조건 믿었다. 요셉은 하느님이 인자하시며, 주님께 바라는 자기에게 주님은 이웃에게 배반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고 우롱을 당하는 고통을 마련해 두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믿기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정직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고통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믿기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율법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율법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도 사랑해서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데도 완전하다고 믿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이웃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으로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겠는가?
  절대적인 사랑. 용서할 줄을 알고, 용서하기를 원하는 사랑 말이다. 자기 마음 속으로 이웃의 결점을 변명하면서 미리 용서해야 한다. 죄인에게 정상을 참작케 하는 모든 사정을 인정하면서 즉시 용서해야 한다.
  사랑과 같이 절대적인 겸손. 다만 생각만으로라도 잘못 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그전에 저지른 잘못보다도 한층 더 해로운 교만을 가지지 않을 줄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만 빼고는 모든 사람은 다 잘못한다. 어떤 남자나 여자가 ‘나는 절대로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한층 더 어려운 겸손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는 경탄할 만한 일들을 거기 대한 찬미를 하느님께 드리기 위하여 알리는 것이 필요치 않을 때에는, 그 특별한 은혜를 받지 못한 이웃을 경시하지 않기 위하여, 숨길 줄을 아는 겸손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아!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당신 자신을 종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엘리사벳은 실제 그대로의 나를 ‘보았고,’ 내 남편도 그것을 알 시간이 그에게 왔을 때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보았다.
  주님께서 너희를 당신의 종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그분께 맡겨 드려라. 그분이 어떤 특수한 사명을 주시는 사람은 누구나가 당신의 무한한 영광에 덧붙여지는 새로운 영광이 되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을 가지고 빨리 그렇게 하고 싶어하신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던 대로의 사람, 즉 그의 창조주를 나타내는 더 작은 완전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은총을 특별히 받은 사람들아, ‘생명’인 유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기 위하여, 너희 위와 너희 안에 영원히 빛나는 태양을 가질 자격을 얻기 위하여 숨어 있고, 침묵 속에 그대로 있어라.
  오! 하느님이시며, 당신 종들의 기쁨이시며 더 없이 행복하신 빛이여, 당신의 것인 이 종들 위에 비치어, 그들로 하여금 그로 인하여 그들의 겸손으로 당신을 찬미하며,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 나라의 광휘에까지 올려 주시는 당신만을 찬미하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