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스물세 살 때 동거하던 여자 친구가 임신하자, 그녀를 내쫓았다. “제 아기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크리스앤과 잠자리를 같이 한 남자는 아닐 거라고 확신했으니까요.” 잡스 전기의 기록이다. 딸이 태어나자 잡스는 이름을 ‘리사 니콜 브레넌’이라고 지었다. 딸의 성(姓)에 ‘잡스’를 쓰지 않았는데, 내 딸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잡스는 모녀에게 생활비를 전혀 주지 않았고, 둘은 정부 보조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사업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가진 잡스에게 미국 정부가 한 일이 무엇일까? 캘리포니아 법원은 잡스가 친부임을 증명하고 그에게 양육비를 강제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잡스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리사가 친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법원은 DNA 검사를 명령했고 그 결과 친부일 가능성 94.41%가 나왔다. 법원은 잡스에게 매달 양육비 385달러(약 41만 원)를 지급하고 친부임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그동안 복지기금에서 지급한 양육비 5856달러(약 620만 원)의 상환도 명령했다. 이는 40년 전 1978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며, 미혼부 책임법의 살아있는 예다.(「스티브 잡스」 참조)
미국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OECD 선진국에는 이 법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미성년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캐나다는 남성이 양육비 책임을 회피하면, 여권사용 정지→운전면허 정지→벌금→구속이 단계적으로 뒤따른다. 덴마크도 미혼부의 책임을 법제화하여 16세 이상의 남성에게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양책임을 지게 한다.(지식채널e 프로그램 ‘그 남자의 권리’ 참조) 성적인 자유를 청소년 시기부터 인정하되,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철저하게 묻는 것이 선진 사회의 근간이며, 학교 성교육도 이 책임의 기초 위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서양이 성개방과 성적 자유만 있는 나라라고 알고 있을까? 누군가 의도적으로 언론과 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챙겨줘야 할 것이 콘돔일까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 사춘기’는 청소년 자녀의 성관계를 절대 반대하는 다섯 가정의 부모 열 명이 두 달 동안 청소년 성문화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청소년도 성관계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모들이 받은 과제는 ‘내 아이가 성관계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이다. 진행자가 “처음 토크를 시작했을 때 아이의 성관계 자체를 생각하기 싫어했던 부모들이었죠? 그들이 이렇게 변했습니다”라는 멘트를 마치자 “합의하에 성관계를 갖게 전에 준비할 것, 그건 콘돔이죠”라는 한 아빠의 말이 나온다. 부모들은 ‘와인’, ‘청소년 임신 방지 및 건전한 성관계 키트’, ‘잠자리 용돈’ 등을 말한다. 진행자는 “다 좋은데요, 단 하나 콘돔 챙기는 건 잊지 마세요”라고 핵심을 정리한다.
다음은 자막 형태로 나오는 결론이다. “스웨덴 학생들은 무료로 배포되는 콘돔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의사처방 없이 피임약을 구입할 수 있다.”(보건교육포럼, 2008) “덴마크는 주 3시간, 연간 3~4주 피임 교육, 초등생 이상을 대상으로 학교마다 피임 클리닉 운영.”(덴마크 가족계획협회) “청소년은 섹스할 권리를 가지며 사람들은 이를 용인해야 하고, 청소년들이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네덜란드 RAP정책, 성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정책)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의 청소년들이 피임교육을 받고, 콘돔 접근성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다큐프라임 ‘사춘기’는 이들 나라에 ‘미혼부 책임법’이 있고, 섹스할 권리에 대한 책임을 청소년에게도 철저하게 부담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교묘하게 포장된 거짓의 성교육
성교육 웹툰 ‘콘돔을 살 수 없는 이유’는 청소년의 콘돔 구입이 불편해 안전한 성관계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콘돔 교육을 시행하지 않는 한국의 성교육을 비판하면서, 네덜란드의 예를 든다. “네덜란드는 조기 피임 교육과 피임 구매환경 조성으로 인해 첫 성관계시 93%가 피임을 하며, 1970년대 12.4세였던 첫 성경험 연령이 18.8세로 늦춰졌다. 10대 청소년 임신율과 낙태율 모두 세계 최저인 성교육 강국이 되었다.”
이는 사실과 거짓을 뒤섞은 속임수다.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 경험 연령은 1970년대 12.4세, 1980년대 15.5세, 2000년대 18세로 올라갔고,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들 중 93%가 피임을 하며, 임신율과 낙태율은 세계 최저이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 305회, ‘누구도 축복해 주지 않는 출산의 공포’ 참조)
콘돔이 첫 성관계 연령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첫 경험 연령 18세 이상”은 네덜란드 청소년의 대다수는 성관계를 안 한다는 뜻이다. 네덜란드 성교육이 청소년 임신율과 낙태율을 세계 최저로 끌어내리면서 세계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미혼부 책임법’이 포함된 포괄적인 성교육을 30년 동안 지속하면서 성관계 문턱을 넘는 청소년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콘돔 공급만으로 첫 경험 연령을 5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네덜란드 청소년은 극히 일부가 성관계를 하고, 그 소수의 대다수(93%)가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 네덜란드 남자 청소년들의 콘돔 실천율이 이렇게 높을까? 임신하면 막중한 책임을 지게 하는 법이 강력하게 실행되기 때문이다. 유럽 남성의 콘돔 사용률이 높은 이유도 책임의 제도 때문이다. 피임산업이 지금보다 더 많은 콘돔을 팔고 싶다면 방법이 뭘까? 한국에 ‘미혼부 책임법’을 정착시키면 된다. 피임산업이 책임의 제도를 지지해야 하는 역설적 이유다.(75차 여성정책포럼, ‘미혼부의 책임강화 방안’ 참고)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성교육의 진실
웹툰은 계속 허위 주장을 한다. “청소년 첫 경험 연령 13.4세. 청소년 임신율과 낙태율을 낮추는 길은 책임 있는 피임 교육과 청소년 안전을 위해 콘돔을 구매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콘돔 교육은 책임 교육이며 청소년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교육이다.” 과연 그럴까? ‘책임 있는 피임 교육’, ‘콘돔 교육은 책임 교육’은 ‘뜨거운 얼음’, ‘친환경 핵발전’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책임 있는 책임을 피하는 교육’, ‘책임을 피하는 교육은 책임 교육’은 의미가 상충되는 우스운 말이다. 15%! 의외로 높은 콘돔 사용 실패율이다. 콘돔을 믿고 성관계하는 청소년이 늘어날수록 임신, 낙태, 미혼모는 증가한다. 이건 상식이다.
네덜란드처럼 첫 경험 연령을 올리고, 성관계하는 청소년 숫자를 줄여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피임 교육 단체는 콘돔만능주의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EBS까지 그 내용을 방송으로 유포하면 대중은 속아서 동의하게 된다. 양심 있는 전문가 집단이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독일에서 한국 남학생이 독일 여학생을 임신시키면?
여학생은 출산하고, 독일 정부는 남학생을 출국 금지하고, 부모를 소환해서 양육비 지급 서약을 하게 한다. 이 둘은 결혼을 할까? 한국 부모는 며느리와 손자라고 생각해서 독일까지 갔는데, 독일 여학생은 “○○와는 잠깐 놀아본 것이고, 내 취향도 아니다. 아기 아빠로만 인정할 뿐, 결혼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한다. 실화다. 우리에게는 충격이지만, 독일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이 여학생은 왜 이렇게 당당할까? 여자 청소년이라도 아이를 키우는 데 편견이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미혼모’가 아니라, ‘단독 양육모’라고 불리는 여성은 아동복지청에서 주거 비용과 양육 수당 등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남자에게는 양육비가 강제된다. 돈이 없으면 국가가 선지급하고, 나중에 다 받아낸다. 임신하면 남자는 경제적 부담이 생기지만, ‘단독 양육모’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밥벌이 걱정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미혼부 책임법이고 복지다. 이 제도가 여성을 보호하기 때문에 독일법이 12주 이내 낙태를 가능하도록 했지만, 독일 여성들은 낙태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
독일의 학교 성교육은?
“사춘기가 되면 남자는 아기를 만들 수 있고, 여자는 임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 아기를 낳으려면 먼저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교육을 받고, 취직해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또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아기방과 각종 시설, 유모차, 유아용 자동차, 의자, 기저귀, 넓은 공간과 충분한 시간, 그리고 사랑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아기를 가지기는 쉽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독일의 초등학교 3학년 성교육 수업 자료다. 확실한 책임 교육이다. 6학년 때는 콘돔 교육을 받는다. 그러면 독일 청소년은 임신 안 할까? 피임은 실패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청소년 임신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작가 무터킨더의 독일 교육 이야기 중 ②충격적인 독일 초등학교 성교육 ③10대에 엄마 아빠가 된 독일 아이들 편 참조)
독일의 사회적 성교육은?
“독일 시내에선 아주 앳된 모습의 소녀들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림잡아 15~16세 남짓이나 되었을까? 사실 ‘저 나이에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독일에선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임 교육을 철저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하여 아이가 생기면 낳는 것이 보통이다.”(오마이뉴스, ‘독일에서 여대생이 임신했다면’ 참조)
청소년의 성적 자유를 인정하고 피임 교육도 하지만, 피임에 실패하면 청소년에게 책임을 묻고, 청소년이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는 사회가 독일이다. 대학생이 임신하는 경우는 더 많기 때문에 독일 대학은 탁아소와 유치원을 설치해 여대생의 학업 지속을 돕는다. 이것이 법과 제도가 시행하는 철저한 생명과 책임의 사회적 성교육이다. 교실 속 콘돔 교육에도 피임에 실패하면 이렇게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청소년의 성관계 권리를 인정하고 또 콘돔 교육이 교실에서 가능하려면, 독일과 같은 튼튼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럽의 대다수 선진국이 독일과 비슷하다. 이런 나라들에서 피임은 성교육의 곁가지지만, 교실에서 콘돔 교육을 하니까 콘돔만 눈에 잘 뜨이는 것뿐이다.
한국, “성교육=피임 교육”
한국 성교육은 어떨까? ‘미혼부 책임법’과 복지가 없기 때문에 책임의 성교육이 성립하는 사회적 기반 자체가 없다. 그래서 ‘성교육’과 ‘피임 교육’이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진실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언론도 없다.
한겨레신문의 “‘쾌락’, 청소년은 좀 알면 안 되나요?”(2017년 5월 20일 자)는 두 종류의 기능성 콘돔(요철식, 약물 주입식)을 청소년이 사지 못하게 한 법을 ‘청소년 쾌락 통제법’으로 명명하고,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고 위헌 소송을 제기한 고3 여학생과 콘돔사 대표의 입장을 전면 기사로 실었다. 주간경향의 특집 기사(2017년 2월 21일 자) “한국의 성교육, 위험한 10대 섹스 부른다”는 ‘가장 좋은 성교육=피임 교육’이라는 입장에서, 콘돔을 배제한 잘못된 학교 성교육 때문에 청소년들이 콘돔 대신 랩이나 비닐을 사용하는 위험한 성관계를 한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학교에서는 콘돔과 피임약을 무료 배포한다는 단편적 사실만 강조할 뿐, 유럽 선진국에 책임의 성교육이 책임법과 복지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중대한 사실은 감춘다.
이는 전형적인 피임 산업의 논리를 언론이 받아적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기사가 EBS 지식채널 프로그램 “있지만 없는 ‘것’, 학교에서 배제된 피임 교육”(2017년 5월 24일 자)으로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스웨덴, 13세 이상 청소년에게 콘돔을 무료로 나눠주는 정책 시행.” ‘EBS’ 마크가 찍힌 화면에 나오는 이 문구만 보면 유럽의 선진국에는 피임 교육만 있고 또 콘돔 무상 배포가 청소년 성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서울시 인권정책기본 계획에 ‘학교 밖 청소년에게는 콘돔 무상 제공’, ‘공공기관(학교, 보건소)에는 콘돔 자판기 설치’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 의견을 반영했다고 하는데, 서울시가 유럽의 거시적 책임 제도는 못 보고, 미시현상인 콘돔만 본 결과다.
콘돔 무료 배포 VS. 책임법과 복지, 무엇이 우선인가?
“선동(propaganda)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한 말인데, 언론과 교육 그리고 서울시까지 콘돔만을 성교육의 왕도로 제시하는 이 상황이 바로 선동이다.
콘돔이 정답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장문의 글이 필요한데, 읽는 이가 많지 않다. 청소년 섹스권과 콘돔 배포가 공교육에 도입되려면 유럽처럼 사회라는 하드웨어가 튼튼해야 하는데, 한국 언론은 심지어 EBS까지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책임법과 복지가 전무한 상황에서 자판기와 무상 배포로 콘돔 접근성만 높이는 것은 286 컴퓨터에 ‘윈도우10’을 설치하여 하드웨어를 망가뜨리는 일이다.
국가가 세금으로 먼저 할 일은 ‘콘돔 배포’가 아니라 ‘책임법과 복지의 확립’이다. 전자는 피임 산업의 배만 불릴 뿐이지만 후자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국가와 교육자는 콘돔 무상 배포와 콘돔 자판기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콘돔이 청소년들에게 무상 배포되는 두 대륙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다. 한국 성교육은 강력한 책임법과 복지가 뒷받침되는 유럽형 책임 모델을 따라야 한다. 한국은 유엔과 유니세프가 청소년에게 콘돔을 무상 배포해야만 하는 아프리카의 저개발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 교육자만이라도 피임 산업의 영업 전략과 선동에 포섭되지 않는 식별력을 갖춰야 한다.
–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fid=1455&cat=9004&gotoPage=4&cid=709116&path=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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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평화신문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