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말 그대로 문제 가정에서 자라났다. 문제의 원인은 어이없게도 집안의 가장이신 아버지 때문이이었다.

  6, 25사변 이후 오랜 군복무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정신의학상 편집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 우리 집안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머니와 우리 오 남매는 매일 이어지는 아버지의 이유 없는 폭력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결국 큰형은 외가댁에서 살았고, 어머니와 어린 우리 형제들은 매일 공포에 시달리며 생활했다. 아버지의 폭력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어머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겹쳐 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동생들에게도 병마가 덮쳐 막내는 간질병을, 바로 밑의 여동생은 뇌성마비에 걸려 집안과 형제들에게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부끄럽게도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한편으로 불쌍한 분이셨다. 가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아버지 때문에 받는 주위로부터의 손가락질 또한 견디기 힘들었다. 아버지 또한 우리 형제들을 당신 자식이라고 생각조차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했고, 그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으셨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냥 눈물이 난다. 그것은 분명 악몽이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돌보심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어머니의 끝없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이웃사람들이 아무리 비난과 동정을 퍼부어도 학교와 교회에서만은 아주 평범하고 부유한 집의 아들처럼 행동했다. 또한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동했다.
  아버지께서 늘 사람을 의심하고 믿지 말라고 하시면 나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믿으려고 애썼고, 하느님을 믿으면 밥이 나오느냐 국이 나오느냐는 말씀도 듣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갔다. 공부하지 말라고 하시면 더 열심히 공부했고, 세상이 더럽다고 말씀하시면 우리 형제들은 세상은 아름답고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수 같은 아버지이지만 잘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때리면 맞고, 어떤 때는 안 맞으려고 집에 들어오시면 불편한 점이 없으시도록 정성을 다했다. 작은형은 아버지의 부당함에 맞서 끝까지 힘으로 달려들어 싸웠지만 나는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악착같이 공부해서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했고 부업을 하면서 형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어린 동생들은 장애와 병으로 늘 몸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고생을 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위 사람들도 열심히 사는 우리 형제의 모습을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와 교회에서는 세상 아무 근심 걱정도 없는 편안한 사람으로 행동했다. 물론 선생님들과 신부님들은 우리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아셨고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나를 참으로 아껴주시는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분과 모든 것을 감추며 지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이 먼저 당신의 집안 사정을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셨다. 그분은 당신이 자랑할 것은 자신의 약점밖에 없다고 하시며 늘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놓으셨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열어 보이고 이웃에게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여야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고 더욱 더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늘 그분은 자신의 부족한 점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 신부님과 짧았던 3개월간의 만남은 참 행복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작 내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아픔과 상처를 계속 숨기고 싶었고, 지금의 현실을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분이 떠나시기 얼마 전 가까스로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이분께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 맺힌 나의 마음과 절망과 고통을 하느님과 신부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 자신을 열어 보이는 순간 해방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신부님은 나를 부둥켜안고 우셨고 나도 울었다. 그런 다음에 나는 절망의 늪에서 조금씩 헤엄쳐 나올 수 있었다. 나 같은 환경에서 자란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한의 속박에서 벗어나 가식적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되었다. 아버지도 진정 사랑하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초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올 무렵, 나는 아버지께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이 말씀에 큰 충격을 받으시며, 아니 우리 같은 집안에 어떻게 신부님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하셨지만 이번에도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성소의 길을 택했다.
  내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고 하느님과 교회에 속하게 되면서 우리 집안은 좋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만 행복해지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무척 미안했지만, 가족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지고, 뇌성마비로 커다란 걱정거리였던 여동생이 국가 공무원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직장을 갖게 되었다.
  막내도 국가 공무원 공채에 합격하여 두 여동생이 나란히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집안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집안 환경을 비관하여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작은형도 집으로 돌아와 성당에 다시 나가며,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되었고, 그토록 성당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성당에 다니시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며 가족과 떨어져 있던 큰형도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속하게 되어 정상적인 가정이 된 것이다.
  정말 나는 아무 희망도 없는 가족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교회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가족을 떠났는데, 진정 하느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신 것이다. 부족한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고 속하는 길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는데 모든 것이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다.
  내가 내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 드림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집안의 가장이 되어주신 것이다. 내가 교회에 완전히 속하게 되자 교회 공동체가 나에게 속하게 되었다.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자 하느님도 온전히 나에게 속하고 싶어하셨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어둡기만 했던 나의 주위 환경은 내가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밝고 희망차게 변화되었다.

  성직자의 길이 때로는 외롭고, 힘겹고, 고독할 때도 있지만 나는 지금 성직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수원교구 사제라는 가족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다.

– 수원교구 김봉기 신부님
– 가톨릭 다이제스트  “앙코르초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