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적 기도와 향심기도

김성봉
(천주교 전주교구 신부)

들어가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30여 년 전1) 미국에서 시작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가 수도자들과 열심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상당한 반응을 얻으면서 수많은 번역물과 함께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도에 대하여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기도 방법을 통하여 자유로운 마음으로 더욱 더 하느님과 일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그 만큼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의 입장에서도 기꺼이 환영하고 장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또한 교의적이고 실천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달리 동양 종교와 심리학의 방법론을 기꺼이 혼합하고 있는 이른바 이 “향심기도”는 미국에서도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마치 검증된 교회의 전통적인 기도처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보급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위주로 무엇이 문제이고 이에 대하여 교회는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보는 것이 적지만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며 살아간다. 기도하는 이유 또한 기지 각색일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평화와 세상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지금 필요로 하는 바가 성취되길 바라기에, 세상살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등등의 이유로 기도드린다.  

  기도하는 이유가 다양한 것 이상으로 기도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교회에서 제시하는 여러 성인들의 기도 방법이 있고, 나름대로의 체험으로 터득한 방법도 있고, 불교나 힌두교 기도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심리학적인 요소를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경우도 있다.
  지향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부합하며, 그 의도가 순수한지, 즉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선을 찾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기도하는 이가 지향의 그릇됨으로 기도를 그르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볼 수 있다. 자주 너무 기복적이라는 이유로 무릇 사람들의 기도를 쉽게 미신적이라고 폄하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바를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히려 기복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피한다면 그것은 마치 필요한 바가 없다는 식의 겸손의 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 방법(Payer method)은 단순한 방법론이나 기술 내지 테크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가 몸담은 종교의 절대자에 대한 생각, 인간의 조건이나 운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 구원에 대한 생각들이 그대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도움이 된다면’ 그리스도인이 힌두교나 여타 동양 종교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도 된다거나 심리학의 방법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해도 된다는 의견은 상당한 주의를 요구하고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양자 간의 관계는 동양 종교의 그것과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기도(명상) 방법을 거의 베끼듯이 따라하는 이유는 그들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창조주 하느님과 창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제대로 깨닫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에서 전개되어 왔고, 그 토양에서 이어져 왔기에 당연히 서양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도 역시 자르고 분석하고, 추리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이 강해서 하느님과 일치로 나아가는데 장애처럼 다가오기에, 오히려 정감적인 동양 종교의 방법이 훨씬 더 순조롭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참된 방법이나 길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기 위해서 교황청 신앙교리성 서한인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전 세계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그리스도교 명상(Oriental form) 2) , 가톨릭 교회 교리서(1992, 천주교 중앙협의회)와 대표적인 영성 작가들의 작품들을 참조하였다.

  특히 17세기 프랑스 예수회원인 루이 랄르망(L. Lallemant)신부의 저서(정확히 말하자면, 저서라기보다는 예수회 제3수련을 받는 제자들에 의하여 쓰여지고 정리된) ‘영적 교의(Dottrina spirituale)’를 주 참고 도서로 삼았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정화(Purification)’ 는 ‘마음의 순결 내지 보존’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지만 루이 랄르망처럼 이를 자세히 다루거나 강조한 이는 드물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화의 중요성이 향심기도나 이와 유사한 기도 방법 내지 기술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다룬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할 수밖에 없는 바로 이 두 종교(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종교)의 상이함을 그대로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조, 인간 조건, 죄와 구원 등에 있어서 다름을 무시하고 그냥 “도와 준다”는 이유로 ‘방법’이나 ‘개념’을 그대로 도용한다면 하느님과 일치라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몰입하거나 침잠하기에 더 편하거나 쉽고 자신에 적합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한 방법이나 테크닉을 사용할 수 있는 구실은 되지 못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렇다고 비교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다루려는 의도는 없으며, 오히려 향심기도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 기도의 방법을 다룸으로써 그릇된 기도 방법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다 더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교적 기도와 향심기도

  기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거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도 방법을 소개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향심기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대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이 다분히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기도 방법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종교들이나 인간 심리학과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온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문헌 ‘그리스도교 명상’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동양의 명상법들이 확산되고 있기에, 우리는 각종 위험과 오류들로부터 벗어나지 않은 시도, 곧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비그리스도교적 명상과 혼동하는 시도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3)

  예를 들어 향심기도의 주창자들은 초월 명상(TM)과 선불교(Zen)의 스승들과 직접 접촉을 가져왔으며, 초월 명상과 심층 심리학의 개념들을 모방, 적용하고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관상을 그것들과 아주 혼동하면서 심리학의 개념들을 직접 사용하고 있다.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키딩(Thomas Keating)-(트라피스트 수도회 아빠스)신부는 향심기도가 심리학과 상당히 중복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그에 의하면, 향심기도의 방법에서 그리스도교 정화의 핵심은 무의식적 동기들과의 투쟁에 있으며, 기도 그 자체는 이전에 억압한 무의식 속의 내용들이 솟아 오르도록 격려한다고 한다.4) 심지어 그는 “요즈음에는 자신에 관하여 살아 있는 심리학적 지식 없이는 영성 생활을 할 수 없다”5)고 말할 정도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심오한 본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 이를 향심기도와 함께 비교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정확히 말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심오한 대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속량된 피조물이 거룩한 성삼위의 심오한 생명과 이루는 일치를 드러낸다. 세례성사와 교회 생활의 원천이고 절정인 성체성사 위에 바탕을 둔 이 일치는 회개의 자세, 곧 ‘자아’로 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전향의 태도를 뜻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진정으로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일종의 습성을 이룰 수 있는 자아 집중 또는 비인격적인 기교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초월적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자유로이 개방시키지 못하는 영적 개인주의 안에 틀어박혀 기도하게 만드는 경향을 탈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진실되이 새로운 명상 방법을 추구하려면,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근본 요소는 두 자유, 곧 하느님의 무한한 자유와 인간의 유한한 자유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6)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7)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묵상은 강생하신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과 성령의 은사 안에서’ 이루어진다.8) 반면에 향심기도는 기도들 마치 적용한 방법과 기술로 얻어 낼 수 있는 무언가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역할과 죄와 보속의 의미를 간과한 듯하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향심기도의 목적은 평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의 지속적인 상태를 위해 ‘무의식적인 장애를 치워 버리는 것’이기에,9) 결국 우리의 무의식 안에 남아 있는 인상들을 비워 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명상’을 보면, 향심기도의 위와 같은 오류를 잘 지적해주고 있다. “이런 그릇된 유형들은 교회의 기도를 둘러싸고 역사 안에서 줄기차게 등장해 왔으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종종 매혹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일종의 해결 방도로, 즉 심리적 또는 영신적인 치유책 또는 하느님을 신속하게 발견하는 방도로 그리스도인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10)

  하느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를 붙잡아 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며, 또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의 삼위일체 생명 안으로 우리를 온전히 끌어들이실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우시다.11)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는 분은 우리들의 죄의 유일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교회와 성사 안에서, 당신의 가르침과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시기 때문이다.

  교황청 문헌 ‘그리스도교 명상’ 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향심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상에서 취하신 방법을 이제는 낡아 빠진 것으로 간주하게 하고, 순수한 은총으로 여겨져 왔던 것을 초월적 인식 또는 체험으로 간주케 하여 “자연 심리학”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도록 유도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12)또한  심리적 또는 영신적인 치유책 또는 하느님을 신속하게 발견하는 방도처럼 권장되는 것이 아닐 런지.13)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인간 조건과 정화의 요구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도의 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그 방법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의 종교가 제시하는 신론, 인간론, 구원론적인 문제이다. 구체적인 기도를 다루기 이전에 이 장에서는 향심기도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바라보는 죄, 구원, 은총 등에 대하여 비교해 보고 이에 따라 마음의 순결이 왜 요구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2.1. 죄와 구원 : 은총과 성사

  기도는 죄와 구원과 같은 인간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심기도를 설명하고 있는 많은 책들 안에서 ‘죄’나 ‘구원’이나 ‘원죄’라는 단어들을 명확하게 찾아볼 수 없으며, 사용이 되더라도 교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그런 개념들로 사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명상’을 보면 이 점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 추구에 선행하고 수반되어야 할 것은 ‘금욕적인 투쟁’과 각자 자신의 ‘죄와 오류로부터의 정화’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마태 5,8)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정화되는 것’이며,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순수하게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이기적인 본능으로 부터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14)

  반면에 향심기도는 앞에서 말한 정화(Purification)에 그만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도 그들이 추구하는 관상적인 집중에서 원래 생각보다 더 마음을 산만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면서15) 이 부분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이처럼 방해되는 요소처럼 여겨지기에 오히려 이러한 죄책감과 같은 ‘사고의 원인을 비워 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교황청 문헌 ‘그리스도교 명상’은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우고 버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기울이면서, 모든 감각적 표현과 개념을 ‘비울 것’을 권장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요로써 충족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비움은 개인적 이기심을 포기하는 자기 극복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 세계의 사물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16)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키딩이 말하는 비워야 할 것은 문헌에서 밝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거짓 자아(False self)이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죄스러움을 모두 짊어지셨다. 이 죄의 결과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가져온 누적된 상처들과 생존하기 위해 썼던 유치한 방법들을 가진 거짓 자아이다.”17) 그러므로 키딩이 말하는 덜어 내야 할 것은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 혹은 정화의 과정이며”18) “정화는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을 직면할 때 일어나는”19)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죄라는 것을 “심리적인 어떤 부족함 정도”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키딩은 이처럼 관상이 무의식으로부터 비워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금욕주의는 금욕 수련에만 열중할 때에 자신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오히려 키워주고 그 병적인 요소를 더해 갈 뿐이기에, 진정한 금욕 수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오는 동기에 대하여 어떤 처리를 해야만 하는 것’20)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심리학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보면 그분 자비의 초대는 우리 측에서 먼저 죄를 인식할 것을 요구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요한 1,8-9) .21)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수 있으며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실 수 있으시다.

  향심기도에서 말하는 정화는 죄나 악습으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비워진 다음에 기도 초기에 머릿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이것으로 정화의 과정이 끝난 걸로 삼고 있다. 그리고 나면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관상을 방해할 장애가 더이상 없기 때문에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죄란 일정 시기에만 지속되는 심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 안에 살고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죄의 실재, 특히 원죄의 실재는 오로지 하느님 계시의 빛으로 밝혀진다. 하느님께 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죄를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 어떤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 구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 등으로만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앎으로써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죄임을 이해하게 된다.”23) 그리스도교 교의는 인간의 죄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생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없이는 아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향심기도 안에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회개와 통회의 중요성이 희석되고 만다. 만일 “관상기도의 과정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풀어 주는 하나의 방법”24)일 뿐이라면 키딩과 그의 동료들은 죄, 정화와 통회를 단지 심리적인 면에서만 다루는 셈이 된다. 죄가 단지 우리들의 무의식 안에 쌓인 상처뿐이라면, 정화하거나 뉘우칠 필요가 없게 된다. 죄가 없다면 사람들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이유도 없게 되며 그분의 수난과 구원도 의미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아들이시기에 죄를 용서하시며,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또한 다음과 같이 신적인 권한을 행사하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츠 2,5). 나아가 당신의 신적 권위로 이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하게 하신다.25)

  죄의 의미가 애매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고 관상의 선물을 받게 해 주는 은총을 위한 자리도 없게 되기 마련이다. 교황청 문헌 ‘그리스도교 명상’은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기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고 또한 그 선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부당한 자임을 깨닫는다고26)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기도와 묵상의 동기는 인간 자신이 완전히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고,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느데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향심기도에서 죄라는 것은 결국 거짓 자아를 없애 내면서 향심기도의 과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화적이고 환경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2.2. 인간 조건

  랄르망은 마음을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악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그의 모든 수덕 생활은 하나의 권고로 줄여 볼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고 깨끗이 하라!” 이러한 강조로 영성 생활 안에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의 가르침과 자신만의 심화로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의 여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뜻 봐서는 키딩과 그의 동료들이 ‘중심'(Center)과 ‘마음'(Heart)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랄르망과 그들 간의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랄르망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마음의 정화의 중요성을 영성 생활에 있어 모든 이에게 필수적인 여정으로 심화시키고 강조하고 있는 반면, 키딩과 향심기도 주창자들은 무의식적인 것을 비워 내는 방법을 발전시키지 ‘의식적인 것’의 정화의 필요성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엄청난 차이점은 인간 조건(human condition = 인간의 영적상태, 참 모습)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랄르망에 따른 정화의 실천이나 키딩과 그의 동료들의 무의식적인 것을 비워내는 과정은 인간 조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키딩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만 인간 조건을 해석한다. “그리스도교 수덕의 핵심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동기들과의 싸움이다.”27) 그에게 있어 개인적인 죄는,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에서 열린 열매 이며, 전 인간 조건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다.28) 이처럼 죄를 ‘무의식적인 무실서의 증상’처럼 해석하면서, 죄를 짓는 인간적 자유의 활동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29)

  키딩은 “진정한 죄의식이란 자기 자신의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끈질기게 지속적이고도 마음을 묶어 놓는 죄의식은 초자아가 작용한 결과이다”30) 라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무의식이 비워진 다음에는 기도 초기에 머릿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느다.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그것을 방해할 장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31)

  이런 의미에서, 그의 말대로 하면, 내적 침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통회나 정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의 장애거리인 사고를 비워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정신을 가라 앉히려고 할 때 의식의 흐름 속에 떠오르는 사고들 가운데 하나를 자아 성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성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체험을 떠나 보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일 성찰한다면,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성찰은 체험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32)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식으로 한다면 키딩에게는 정화의 진정한 의미가 부각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 우리 죄로부터 유일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이 감추어지기 마련이다.33) 모든게 인간 조건을 바라보는 그릇된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간 조건에 대해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의 내면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3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에서 신앙의 빛에서 바라본 진정한 인간 조건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뜨려 버렸다.” 35)

  이러한 면에서 랄르망은 마음의 정화와 보존의 중요성을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악의 뿌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36) 이처럼 인간 조건에 있어 마음 정화의 필요성은 영적 단계들을 밟기 이전 부터 계속하여 요구되는 것이다.

  “마음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머무는 거처이다. 마음은 우리의 이성이나 타인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숨겨진 중심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만이 마음을 살피고 감지하실 수 잇따.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성향의 가장 깊은 곳이기에, 결단을 내리는 자리이다. 마음은 우리가 삶이나 죽음을 선택 하는 곳, 바로 진리의 자리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은 서로가 만나는 자리이며,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이다.” 37)

  2.3 마음의 정화

  앞에서도 잠깐 다루었지만, 그리스도교적 기도를 마음의 순결과 별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마음의 정화”라는 점이 이처럼 묵상과 관상에 있어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향심기도 주창자들에게는 거의 결핍되어 있고 등한시되었거나 잘못 이해된 부분이 많다.
  
  랄르망 신부는 마음의 정화가 내적 생활에 필수적이며 성령에 이끌려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주장하면서 무엇보다 마음의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가르치시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간 조건이 어떠한지 알면 마음을 어떻게 정화해야 할지도 알수 있게 된다.

  키딩 역시 정화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정화에 대한 그의 관점은 교회가 말하는 관점과 다르다.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면 내적 정화의 작업을 갖게 한다.”38)  키딩의 저서 “하느님과의 친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 혹은 정화의 과정이다. 정화는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을 직면할 때에 일어나는데 이것은 성서의 내용과 자신을 생생하게 동일시하는 결과로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정직함이 발달하기 때문이다.”39)

  그는 또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모든 좋은 일을 하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시며 우리는 그것에 동의를 하는 것이다40)고 주장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우리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해 주시고 정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죄를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삐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친다. 죄는 ‘영원한 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41)

  그러니까 죄는 단지 기술로써 비워야 할 남아 있는 무의식적인 상처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시편 52.4).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최초의 죄와 마찬가지로 죄는 선과 악을 알고 규정하는 ‘하느님처럼'(창세 3,5) 되겠다는 헛된 의지로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42)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죄와 마음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의 뿌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의 자유 의지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마태 15,19-20)’. 선하고 깨끗한 행동의 근원인 사랑도 마음속에 있는데, 이것을 죄가 해치는 것이다.”43)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간에 죄의 모든 원인들은 마음의 상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으로 현대 세계를 괴롭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 박힌 더욱 근본적인 저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바로 인간 자체 안에서 여러 요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44)

  랄르망은 우리 인간 조건의 현실이 어떠한지 잘 관찰하였으며 이리하여 우리의 모든 악의 뿌리가 숨겨져 있는 마음을 정화하고 보존하면서 영성 생활에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키딩은 관상기도의 발달 중 첫 단계를 우리의 일상적 ‘심리세계의 속박으로 부터 독립’되고 있다는 자각으로 보았다.45) 그는 이런 식으로 첫 단계로서의 마음의 정화의 중요성을 혼동하고 있으며 적어도 그릇된 방식으로 심리 세계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거룩한 말씀은 우리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을 동의하는 몸짓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의지가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아서, 말하자면 우리의 유기체 안에 있는 전류(거룩한 생명)가 돌게 하고 거룩한 에너지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에너지는 이미 내 안에 있으면서 활성화 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현존 안에 앉아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펼쳐진다.”46)  그의 말대로 한다면, 향심기도는 우리 자신을 떠나보냄으로써 그 무한한 하느님의 선하심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단순한 방법이다.47) 하지만 무한한 선하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순결을 늘 유지하고 보존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키딩은 또한 양심 성찰, 통회와 보속의 의미를 거론하지 않고 계속해서 향심기도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48) “우리가 십자가 밑에 앉아서,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결별되면서 생긴 모든 결과들을 받아 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과 우리를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정서적 상처들과 양심에 받은 상처들이 치유된다.”49) 이렇다면 계속해서 비워 내라는 권고는 말장난 처럼 들리게 된다. 왜냐하면 치유가 마치 아무런 통회나 개인적인 보속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딩 역시 관상기도의 목표 자체가 사고나 대화를 없애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비우는 셈이 된다고50) 말하고 있다. 이것이 키딩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길 바라지만, 사실 이를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는, 신앙의 빛안에서 자신의 현실을 알아야 하고 다음과 같이 교회기 가르치는 대로 이를 직면할 줄 알아야 한다. “참 행복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는 결정적인 도덕적 선택 앞에 서게 된다. 참 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는 악한 본능을 정화하고, 무엇보다 우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권유한다.”51)
  
  키딩이 말하는 인간은 죄에 관해서 수동적이기만 하기에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의지로 회개하려 해야 한다는 점을 빠뜨리고 만다. “성서의 유의적인 수준의 의미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폐물들을 덜어 내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 폐물들이란 우리가 잉태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끼친 정서적 손상들을 말한다.”52) 한마디로, 마음의 의지적인 정화를 모든 이에게 필수적인 단계로서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거룩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손해를 비워 내라고 계속해서 촉구하고 있다. “관상기도의 과정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풀어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53)  그러니까 키딩에 의하면, 향심기도에서 요구되는 것은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하는 것 뿐이기에,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도 본래의 생각보다 더 마음을 산란케 하는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54)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55)

  17세기 예수회소속 L.랄르망 신부의 ‘영적 교의(Dottrina spirituale)’에서 마음의 의미와 마음의 현실에 대하여 말하는 바는 교회의 가르침과 그야말로 일관되어 있다. “교회의 영적인 전통은 또한 성서에서 ‘존재의 심연’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이 마음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것을 강조한다.”56) “모든 죄의 뿌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죄의 종류오하 경중은 주로 그 대상에 따라 헤아린다.”57) “마음은 도덕적 인격의 중심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음란….과 같은 여러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마태 15,19). 육체적 탐욕에 대항하는 싸움은 마음의 정화와 절제와 실천을 필요로 한다.”58)

  마음의 정화에 관해서도 L. 랄르망의 교의가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뵙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모든 것을 보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육체와 이웃의 육체, 곧 인간의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하느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59) 마음의 순결은 하느님께서 보시듯 다양한 현실을 보도록 해 주기 때문에 삶을 위한 빛의 원천으로 해석된다. 또한 육정에 이끌린 정화되지 않은 이가 보듯이 타인을 경쟁자나 적으로, 육신을 불규칙적인 육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이웃으로, 육신이 아닌 하느님의 성전이자 하느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마음의 정화는 기도와 정결의 실천, 의향과 신선의 순수함을 필요로 한다.”60)

3. 본격적인 기도 과정

  위에서 살펴본 바를 바탕으로 이제 기도하는 데 있어서 마음의 순결과 통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고,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과정에서 사고와 사아상이 과연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없애버려야 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3.1 기도 여정에 있어 마음의 순결과 통회의 역할

  앞에서도 잠깐 지적하였듯이, 랄르망의 ‘영적 교의’에서 마음의 순결은 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서 늘 커다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기도의 여러 단계들과 형태들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전에, 그는 마음의 순결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기도의 여정에서 정화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정화없이 진정한 기도는 불가능하며 정화가 없다면 기도하는 자는 덕을 닦으면서 진보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기만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님께서도 산상 설교에서부터 마음의 회개와 마음의 순결로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으로라고 강조하셨다.61) 교회는, 오로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 추구에 선행하고 수반되어야 할 것은 금욕적인 투쟁과 각자 자신의 죄와 오류로부터의 정화이며, 62) 이처럼 회개하기로 결심한 마음은 믿음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63)

  향심기도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오히려 분심이 들게 할 뿐이므로 이를 의식하지 말고, 무의식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향심기도는 위에서 말하는 정화에 그러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을 뿐더러,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도 본래의 사고보다 더 산만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64) 오히려 하느님과의 일치에 방해도리 뿐인 온갖 종류의 사고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오히려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더 의지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이 실질적으로 하게 되는 의지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죄악감과 죄책감은 하느님 사랑과 연관이 없는 상처와 손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그릇된 관찰에 있다. 즉 향심기도에서는 기도에 방해가 되는 것이 마음의 순결의 부족이나 통회의 소홀함이나 덕행 실천 없는 삶이 아니라, 집중하는 것과 참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은 자신의 죄와 사고를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하기에 결국, 의식하고 있는 죄들마저 소홀히 하게 된다. 정화의 여정을 소홀히 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결국엔 그르치고 마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기도를 기술이나 심리적인 방법들로써 얻어 낼 수 있는 무언가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역할과 죄의식과 죄책감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다만, 향심기도의 목표는 통회로써 복구된 하느님과의 우정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의 영원한 상태 안에 무의식적인 장애물들을 비워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무의식에 남아 있는 인상들을 비워 내라고만 재촉하고 있다.
  
  기도 안에서 제시되는 마음의 순결과 통회의 문제는 그러므로 단지 기도를 위한 준비 자세로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구세주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 묵상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업적들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깊이를 명상을 통해 파악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65)
  
  그러므로 향심 기도에서 말하는 정화는 죄나 악습으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무의식이 비워진 다음에도 기도 초기에 머릿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느다.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그것을 방해할 장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66) 이처럼 마음의 정화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참회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정감의 기도의 자세에서 랄르망은 단짝 친구에게 하듯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으로부터 정화될 수 있도록, 마지막 기도 이전에 범했던 자신의 죄와 부족한 점들 또는 욕정과 나쁜 습과, 잘못, 어려움, 걱정, 지겨움, 약점과 두려움을 드러내면서 정겹게 다가가도록 권고한다.67)
  
  향심기도에서 기도하는 자는 정신 분석적 방법을 적용한다. 즉 무의식 안에 잇는 사고들이 자동적으로 빠져 나오길 바란다. 그러니 자연히 양심 성찰도 인간적인 행위로만 보이기에 이를 하는데 힘들어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 죄라는 것도 상처에 가까운 것이기에 그들이 의식적으로 범한 죄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들이 수동적으로 받은 상처를 중시한다. 이리하여 유일하게 용성할 수 잇고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예수님을 거슬러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는 의식이 모자라게 된다.
  
  다른 말로, 결국 무의식만 중요하다 보니 의식적인 것은 만들어 낸 습성이나 교육의 산물로 보게 되므로, 내가 의시하면서 죄를 지었고 저질렀고 잘못한 가해자로서의 입장과 책임감은 슬며시 빠져나가게 된다. 반면에 무의식 속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기에 나는 상처를 받았고 당한 피해자로서의 성격만 강해지고, 자연스럽게 상찰이나 죄나 통회나 고해에 대한 사고들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숨어 버리고 가장하는 셈이 되고 만다.

  3.2. 생각과 상상은 기도에 장애물인가 아니면 구성 요소인가?

  향심기도의 방법에서, 사고란 감각적 자각, 감정, 영상, 기억, 성찰, 해설, 등과 같은 것 모두를 망라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기도 가운데 어떤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간다. 68) 즉 기도 안에서 떠오르는 사고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업적들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깊이를 명상을 통해 파악하려고 애쓴다. 하느님의 이러한 신비들은 언제나 인간적, 지상적 차원을 통하여 인간에게 드러난다.69) 반면, 향심기도를 비롯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로부터 출발하는 방법들을 포함하여 그와 유사한 명상 방법들은 가능한 한 지상적이거나 감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거나 또는 개념적으로 한정된 모든 것을 제외시키려 꾀한다. 70)

  사실 이와 유사한 기술들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줄기차게 밝혀지고 반대되었다. 성녀는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관심 자체가 마음으로부터 아주 많이 생각하도록 충동질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리스도교적 명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배신 행위’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예수의 성녀 데레사;S.Teresa , ‘자서전’ 12,5;22,1-5).71)

  성녀 데레사는, 우리 측에서 먼저 지성적인 기능을 중지시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72) 성녀는 ‘자서전’에서 계속하여, 어떠한 기도 단계나 영적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인성이 절대 빠져서는 안되고, 그야말로 진보한 영혼들만이 이러한 문제점이 없기73) 때문에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에 대하여 묵상하지 않는 것은 겸손의 부족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부관상의 은총 없이는 대화와 사고의 활동을 완전히 억누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자신의 책 ‘가르멜의 산길’ 에서, 이러한 관상의 길로 처음 들어서기 시작한 자에게는 자연적인 대화와 자연적인 능력의 활동이 가끔씩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74) 이처럼 예수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부관상 단계에 이르기 전에 또는 하느님이나 그분의 은사가 우리를 차지할 때에(우리들의 능력 안에서 활동하면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지성의 사용과 상상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토마스 키딩 신부와 동료들은 ‘사고’란 감각적 지각, 감정, 영상, 기억, 성찰, 해설 등과 같은 것 모두를 망라하는 단어라고75) 여기기 때문에, 기도하는 동안 생각이 떠오르면 거룩한 단어로 살며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영혼의 상태와 기도의 단계와 상관없이 이를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사고, 상상과 분심으로부터 도망치는데 의외로 강박적인 모스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교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기에, 기술(technic)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76)

  이처럼, 영성사에서 사고력, 상상력, 감정, 의욕은 기도에 있어서의 역할 때문에 줄곧 많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요소들은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늘 쫓아 버려야 될 요소들이 아니라, 묵상을 위한 요소로서 사용되며 하느님께서도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통하여 당신을 전달하신다.

  묵상기도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말하듯이 “사고력, 상상력, 감정, 의욕을 동원하는 탐색적인 기도이다. 묵상의 목적은 우리네 삶의 현실에 비추어 고찰한 주제를 신앙을 통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77)

4. 관상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관상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덕을 닦는 데 진보한 이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다.

  다른 말로, 관상은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받기 위해서는 준비나 자세등이 요구된다. 그러나 향심기도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제시한 방법을 실천하면 마치 ‘패시트 푸드’ 처럼 확실하고 신속하게 관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이러한 오류는 관상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런 면에서 랄르망의 교의는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의 준비된 자세 사이의 참된 관계와 향심기도가 관상에 관하여 불러 일으키는 문제점들을 알아듣도록 다양한 면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관상이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인지 아니면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인지를 살펴본 다음, 이를 위한 참된 자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4.1. 관상은 하느님의 은총인가 아니면 인간 노력의 결과인가?

   그리스도교 관상은 오직 은총으로서만 가능한 그야말로 선물이다. 하지만, 향심기도는 영적인 체험들을 그들의 기술로 만들어 내려는 듯하다. 토마스 키딩과 추종자들은 독자들에게 관상은 그야말로 은사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향심기도를 수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관상이라는 선물을 “항상”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잇다.

  랄르망이 정의 내리는 것처럼, 관상은 하느님과 신적인 것에 대한 단순하고 자유로우며 통찰력 있고 확실한 바라봄이며, 사랑에서 오고 사랑으로 향한다.78) 이 관상의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로 이루어 지기에 인위적인 방법이나 기술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79) 사람들은 다른 기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순결을 보존하고 자기애를 버리며 덕행을 실천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반면 향심기도에서는 묵상, 관상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데 혼동을 하고 있다. 특히 초심자가 필수적인 이러한 여정을 밝고 다양한 단계와 형태의 기도를 명확히 하는 대신에, 짧은 시기에 관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랄르망은 각자가 자신이 도달한 영성 생활의 단계와 상태에 맞는 기도를 충실하게 해햐 한다고 말한다.  많은 영성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랄르망도 크게 세 개의 형태나 단계로 나누면서 기도의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즉, 정화의 길에 있는 초심자에게는 묵상의 기도를, 이미 진보하였고 조명의 길에 있는 자에게는 정감의 기도를, 그리고 일치의 길에 도달한 완덕의 길을 걷는 자에게는 관상의 기도를 해야 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모든 단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랄르망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께 투신하지 않은 채 신적인 일치와 가장 숭고한 기도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 결국 자신을 속이는 짓들이라고 비판하였다. 81)

  향심기도의 주창자들과 실천하는 자들은 관상 이전의 이러한 단계들을 무시하고 있다. 키딩의 글 자체가 묵상과 관상에 대한 모호함과 82) 관상을 집중 기술로써 낚아채려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겠다는 열망을 일상 생활과 기도 속에 나타내 보일 때, 어떤 지점에서, 우리의 활동들은 단순화된 정감적 기도라고 불리는 활동으로 축소된다. 이 정감적 기도란, 한 문장이나 두 문장 혹은 몸짓이나 영적인 의미로서 시각으로 하는 상상- 영상이 아니라- 등을 말한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거룩한 단언(단지 우리의 지향의 몸짓, 그래서 사랑의 표현의 사용이 의식에서 떠나 버려서, 평화의 감각, 아니면 하느님에게 붙잡혔다는 감각, 혹은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 느낌을 다소간에 인식하게된다. 무슨일이 여기에서 일어났는가 하면, 거룩한 단어로 계속 반복하면서 지향을 계속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이제 그 스스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단어가 사라지면서, 거룩한 단어로 우리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우리의 아주 단순한 행동과 성령의 활동이 만나는 그러한 곳- 비인간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면 우리는 엄격한 의미의 관상에 도달한 것이다.”83)

  이들이 관상을 긴장이완화되고 수동적인 순간과 혼동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 측에서의 준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상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성질의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선물을 맘대로 조작할 수 없고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낼수도 없다. 그리스도교 관상은 오로지 은총으로서만 가능한 선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향심기도는 영적 체험들을 자신의 기술로 만들어 내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심지어 키딩과 그의 견해를 같이 하는 자들은 그들의 독자들에게, 관상은 그야말로 선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향심기도를 실천하는 자에게 “항상” 이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향심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84)
  
  이러한 이유로 키딩은 그리스도교 전통보다는 심리학을 더욱더 신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요즈음 자신에 관하여 살아 있는 심리학적 지식 없이는 영성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85)  “그리스도교 전통들은 어느 정도 방법론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86)

  그러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 의하면, 관상은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낼 수 없고 이를 얻어 내기 위하여 애를 써서도 안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지 않는 한 더 높이 오르려 하지 말도록 하십시오.”87) 사실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그처럼 높은 단계에 신적인 호의로 올라가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관상은 온전히 주님이 내리시는 선물이요 구령에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88) 모두가 이러한 관상기도에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진정 사람들을 관상으로 이끌고 싶다면, 기도의 여러 단계들과 단계마다의 의무를 제시해야 하겠지만, 그들은 이러한 점에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향심기도의 실천으로 관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러한 단계들을 따르지 않는다.
 
 키딩과 그의 협력자들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관상을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얻어 낼 수 잇는 무언가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점들은 그가 관상으로 이끌어 주는 다양한 방법들을 설명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딩은 ‘하느님과의 친밀’이라는 책의 뒷부분에 관상기도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관상기도의 방법 :
     1) 관상으로 자동적이게 이끌어 주는 수련;
     2) 관상을 촉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든 방법:
      – (1) 집중적 방법 : 예수기도, 만트라 기도, 돔 요한 메인의 그리스도인 묵상 방법;
      – (2) 수용적 방법: 향심기도, 믿음의 기도, 가슴의 기도, 단순의 기도[….].” 89)

  다른 말로 키딩과 그의 동료들은, 관상이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우선적으로 이를 받게 될 인간의 영적 자세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고, 향심기도의 꾸준한 수행과 그들 방법으로 사용된 인간적 기능에 달려 있다고 하는 셈이다. 그들에 따르면 관상은 이러한 사고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를 동의하는 것이 향심기도에서 요구되는 활동의 전부다.”90)  이렇게 향심기도의 수행자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얻고 관상을 체험하기 위하여 헛된 시도를 하고 마는 셈인데, 관상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의 선물이기에 하느님께서 이를 전해 주지 않으시면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91)그리고 죄와 자신의 삶의 무질서에 대한 참된 정화없이 이에 다다르려 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한 일이다.

  4.2. 관상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자세들

  일반적인 관상은 초자연적인 성질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바를 가로막는 죄, 욕정, 애정과 애착들을 더 이상 한 영혼 안에서 찾아볼 수 없을 때, 숭고한 인식과 빛, 고상한 감정과 영적인 맛으로 영혼의 능력을 높여 주시게 된다.91) 랄르망이 요약한 바와 같이, 관상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선물이므로, 이를 받기 위해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이나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오로지 영적인 자세이다. 향심기도에서 관상을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 집중의 열매처럼 이해할 뿐 아니라 초심자도 향심기도의 꾸준한 수행을 통하여 관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수행자들이 아주 쉽게 관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사실 관상은 그들이 중시하지 않는 정화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내적인 변화를 겪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고나 사고의 활동에 머물지 말라고 하는 향심기도의 기술과는 달리,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부적인 관상이 아니라면 사고 활동과 대화의 완전한 중지를 반대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12; ‘영혼의 성’, 제 사궁방 3장;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15장). 하느님께서는 관상기도의 선물을 일반적으로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자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시지만 일반적으로 덕행에 진보한 자들에게 주시며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영적 상태를 막론하고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관상기도에 다다를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는 , 마치 조용한 방에서 제시한 대로 몇 분 동안 수행한 다음 관상을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관상에 투신하는 삶으로 들어가기 전에, 영혼은 도덕적인 삶과 영적인 성숙을 지녀야 한다. 이 때문에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관상가들의 고생은 크지만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을 거친 사람들93) 이라고  말하고 있다. 향심기도 주창자들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여기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또한 관상과 같은 기도의 삶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덕행을 실천하기를 꾸준히 권고 하였다. 자신의 책 ‘완덕의 길’에서 성녀는 성덕에 힘씀이 없이는 묵상도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94) 성녀에 따르면 겸손은 기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95) 또한 “겸손과 극기와 이탈, 그리고 다른 덕들이야말로 항상 틀림이 없다”96)고 하였으며, 위에 말한 덕들을 닦으면서 관상을 준비하라고 부탁하였다. 또한 기도를 할 때에 처음에 할 것은 성호와 양심 성찰, 그리고 죄의 고백이라고 하였다. 97)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자신의 책 ‘깔멜의 산길’에서 대신덕(大信德)이 영혼의 능동적인 밤에 갖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감각의 밤 이전에도 마찬가지 이지만 말이다. 관상은 근본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선적으로 덕행을 실천하고 온갖 악덕과 결점과 죄로부터 마음을 보존하고 하느님과 합일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벗겨 내면서 영성 생활을 꾸준히 하는 자에게 이를 선사하신다. 관상의 세계에서는 관상을 손에 넣을 수 잇는 어떤 기술이나 신속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면서

  향심기도를 시작하였거나 이미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전에 하던 기도 방식들보다 방법이나 기준이 훨씬 더 확실하게 다가오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뭔기 해방되고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때문에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이를 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수도자와 성직자들 뿐만아니라 평신도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전통적인 방법처럼 여기면서 이를 실천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향하여 더욱더 나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덕에 있어서 진보하는 대신 자기 만족에 빠져 살면서 결국 신앙 안에서 빗나가고 만다.

  위에서 살펴본 이러한 문제점들은 단지 기도 방법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여타의 동양  종교들 그리고 인간 심리학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연유한다고 볼수 있다. 심층 심리학과 동양 종교와의 이러한 혼동은 죄, 구원, 은총, 성사 등에 대한 과소평가와 몰이해에서 온다. 이러한 면에서 랄르망은 제대로 좋은 열매를 맺으면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무엇보다도 마음의 순결, 통화와 정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그리스도교 명상’, 랄르망의 ‘영적 교의’를 따르면서, 왜 마음의 순결이 그토록 중요한지 살펴 보았다. 이러한 면은 향심기도를 시작하는 자들에게 결여되어 있으며, 거의 소홀히 취급받거나 잘못이해되었다. 성경에서 계시된 교회의 가르침은 내적 생활의 여정에서 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는 자기 자신 안에 남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의지와 애정의 일치인 친교를 나누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면 하느님과 소통할 수 없다 . 사실 랄르망을 비롯한 영성 작가들은 마음의 순결과 정화를 늘 동반하면서, 자신의 영성 생활의 단계와 형태에 맞는 기도를 꾸준히 실천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비록 사람이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려 한다 하더라도 기도는 선물이기에 그 주도권은 늘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관상은 근본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성격의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은 덕행을 실천하고 온갖 악덕과 결점과 죄로부터 마음을 보존하고 하느님과 합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벗겨 내면서 영성 생활을 꾸준히 하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이를 선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