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엉덩이에 난 종기보다 내 몸에 난 뾰루지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든 내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될 때 그 고통은 크게 보이고 심각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겪는 모든 형태의 고통마다 불가피하게 “왜?”라는 물음을 묻는다. 신비롭게도 이 물음은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해 준다. 고통은 탁월한 ‘하느님 코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은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다. 고통의 극한 체험은 바로 ‘최종적 포괄자’인 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종적 포괄자’는 우리가 음식점 종업원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장, 나오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뉘앙스로 알아들을 수 있겠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모든 현상 밑 심연(深淵)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슬픔의 밑바닥, 절망의 밑바닥, 바로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체험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그리스도교 변증가(辨證家) C. S. 루이스는 고통이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만드는 하느님의 확성기”라고 말했다. 평소 하느님 음성을 못 듣던 사람들이 고통스런 일이 생겨야 비로소 하느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렇듯이 인간은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의 시작이며,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의 기회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최근 사람들이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들이 쉽게 목숨을 끊은 것은 현실적 고통의 그 너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의 안목을 가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하느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원망하고, 욕을 해대는 한이 있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은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은 원죄(原罪)의 결과로 생겨났지만 고통이 벌(罰)인 것만은 아니다. 그냥 괴로워하라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이 사람에게 유익할 때가 있다.
우선,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준다. 고통이 없다면 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고통은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또 고통스러운 과정은 사람을 성숙시켜 준다. 운동선수들에게는 땀과 고통이 발전을 가져다 준다. 세계적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한 것은 다름 아닌 훈련의 고통이다.
고통이 영성적 의미를 지닐 때도 있다. 하느님께서 영적 성장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견책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성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6)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매를 드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잘되라’는 교육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호세 5,15) 하신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계획에 고통이 주어지는 심오한 뜻을 일러주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정화의 열매가 달리기에 이런 고통을 치러낸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욥 23,10).
둘째, 시험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그 의도는 성숙의 은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권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 4,12).
셋째, 다른 사람 구원을 위해 겪는 고통이 있다. 이 대속적(代贖的)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 2,24).
요컨대, 견책(譴責)으로 받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잘못된 길에 들어선 당신 자녀를 제 길에 들어서도록 주시는 고통이며, 시험(試驗)으로 받는 고통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시는 고통이며, 대속적(代贖的) 의미의 고통은 남을 위해 우리 자신이 공로를 쌓도록 초대하시는 고통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 그 고통을 승화시켜서 더욱 높은 의미의 고통으로 봉헌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고통에 의미가 있고 없는 것도 결국 우리 자세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당장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피하려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뒤에는 반드시 선한 의도가 깔려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고통스런 여정을 가게 했을 때도 거기에는 이스라엘을 믿음의 백성으로 훈련시키려는 선한 의도가 서려 있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이 가장 곧은 길이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납득이 안 가는 고통 뒤에서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하느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답을 위한 때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위한 때다. 만약 네가 창조의 놀라운 세계에서 나의 선함과 위대함을 체험할 수 있다면, 너의 고통 안에서도 나의 선함과 전능함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준비되어 있을 때 나는 너에게 답을 줄 것이다.”
– 3. 하느님 코드, 고통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