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예수님의 입술이 움직이며 드디어 그분은 그들에게 엄숙히 명령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20).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16).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 가톨릭 교회는 탄생되었다. 성서와 전승(傳承), 역사에 의해서,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굳건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다는,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네 가지 징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가르치는 조직체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조직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하셨는지를 가르쳐 주는 조직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믿음과 일치해서 살아야 할지를 인도해 주는 조직체, 나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알려 주는 조직체이다.
  분명하게, 명백하게, 똑똑하게, 아무런 오류도 없고 거짓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신 확실성과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한 확실성이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는가?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으뜸을 정점(頂点)으로 일치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으뜸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계승된 교도권(敎導權)을 행사한다. 그러면 이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이 권한을 주셨는가? 사실은 어떤가? 도대체 교황의 무류권(無謬權)이란 무엇인가?
  ‘교황(Pope)’이라는 말의 본뜻은 단지 아버지(Papa)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아버지들의 아버지(Pater Patrum)라는 두 말마디에서 나온 것이다. 교황은 베드로의 주교좌(主敎座)를 이어 받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므로 성교회의 으뜸이 된다.
  무류성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성교회의 으뜸인 교황이 최고의 목자로서 온 성교회에서 받들어야 될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틀릴 수 없도록 하느님께서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신다고 성교회는 믿는다.
  ‘교리를 정의한다’는 말은 성교회가 믿는 바를 공식으로 선언한다는 말일 뿐이다. 어떤 새로운 교리를 제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 외에 다른 이설을 가지고 교리를 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봉인되었다. 그 이후에는 아무 것도 보탤 수 없고 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의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성교회의 가르침이었던 것을 단지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일 뿐이다.
  325년에 니체아 공의회에서 교황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정의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교황이 새로운 교리를 만들었다는 뜻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미 3백년 동안 로마 제국의 땅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간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교회를 교도(敎導)한 이후 그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계승하였고, 박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들 중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순교의 영관(榮冠)을 받았다. 초대 교회의 서른 분의 교황은 차례 차례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이들의 가르침은 이미 확정되어 있던 신앙 교리이지 새로운 신앙 개조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정의하였던가?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의 교묘한 이단설로 인해 이 교리가 큰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 교리를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 네스토리오, 펠라지오, 에우디쿠스 등이 주장하던 다수의 그릇된 이단 교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 속에 침투하여 참 교리를 훼손하려고 했을 때도 교회는 정통 교리를 확정 발표하였다.
  교회가 이와 같은 보호 조치를 강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교회의 본 신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보호 조치가 타당한 것임은 분명하다. 나의 지성과 이성은 이러한 오류로부터의 보호 조치를 당연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확고한 신앙을 정립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모든 가르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목자가 이러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에 양들은 오류라는 이리 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리 밝혀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교황이 개인 자격으로 신학에 관해서나 또는 정치, 경제, 과학, 역사 등에 관하여 글을 쓰는 경우에는 무류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류권(無謬權)은 오로지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항으르 정의할 때만 해당되며, 온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 경우에만 국한된다.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무류권은 교황 개인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고 직책에 따른 직무이기 때문이다. 무류권은 교황의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의 안전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무류권이란 교황이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뜻인가? 교황은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한 존재라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개인적인 약점도 있을 수 있으며, 덕성이 부족하거나 교회 지도자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적을 남긴 인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수장(首長)으로서의 직책과 개인의 약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령 성직자 중 어떤 사람이 죄인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다른 이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성무(聖務)를 집행할 수 있다. 교황 역시 인간적 한계성을 지닌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지도자들로 인해 특별한 축복을 받아 왔다. 사도들은 겨우 열두 명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배반하였고, 하나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체포 당하실 당시에는 대부분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쳤었다.
  사도 시대로부터 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기까지 264명이 베드로의 직책을 계승해 오고 있다. 교회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거나 교회의 약점을 고의적으로 헐뜯기 위해 덕성(德性)이 부족했던 교황들을 들추어 내어 본들 그 수는 불과 오륙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무류권이라는 특권을 정말로 베드로에게 주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완성하실 무렵이었다. 그분은 사도들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엿새 동안 밤낮으로 기도하셨다. 폭풍이 일기 전의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죽음의 세력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항하여 몸서리치며 발광하기 일보 직전의 고요함이었다.
  이 때 조직체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동안 그리스도에 의해 훈련된 요원들에게 헌장이 수여되었다. 세상 마칠 때까지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수행할 준비가 끝났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셨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태 16,13)

  우리는 이 물음의 의미와 그 대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당시 그분의 말씀을 듣던 사도들 대부분은 이 물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태 16, 14).

  이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 밝히시려는 의도로 단도 직입적으로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 15)

  모두가 긴장하여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윽고 시몬 바르요나의 외침으로 침묵이 깨어졌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 중의 하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심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 16).

  이 말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협정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신약이 조인(調印)된 것이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 17).

  이것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성부의 뜻이다.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조직체를 결성하는 말씀을 하신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어 특별한 사명을 맡기실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사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이름으로 고쳐 주셨다. 예를 들면 아람족의 후손인 아브림을 선택하시어 그에게 장차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에 걸맞게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이 담긴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창세 17, 5 참조). 또한 야곱을 새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하셨을 때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하셨다(창세 32, 29 참조).
  하느님께서 또 다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빈 구석이 있을 수 없다.
  다시금 한 사람을 택하시어 특별한 임무를 맡기신다. 시몬 바르요나라는 이름을 베드로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다. 마태 복음 16장 18절에 언급되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 Petrus 에서 나온 말로 영어로는 Peter, 프랑스어에서는 Pierre 라고 표기한다. 대부분의 영어 어휘가 여러 외래어와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을 영어로는 실감 있게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가령 바위에 해당하는 rock 은 색슨족의 언어에서 나온 것으로 베드로 이름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petrus와는 언어의 출처가 완전히 다르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사용하시던 아람어로는 베드로에 해당되는 단어는 Kepha 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시몬 바르요나를 바위를 나타내는 Kepha 라고 호칭하셨다. 이 ‘케파’라는 말마디는 땅 속에 뿌리를 깊게 박은 바위를 뜻하는 것으로, 파멸될 수 없는 영속성을 상징하고 있음을 밝혀 두고 싶다.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지목한 단수 2인칭 ‘너’를 사용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 15) 하고 물으셨을 때에는 복수 2인칭인 ‘너희’였지만,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베드로 한 사람을 지목한 단수 2인칭 ‘너’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시몬 바르요나는 교회의 반석인 시몬 베드로 또는 시몬 케파라고 호칭되었다.
  성서의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기만 하면, 말마디의 뜻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공연한 가설이나 억측은 있을 수 없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 으뜸이었으며, 언제나 최종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성서 구절을 살펴 보자.

  1.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유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사도의 정원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사도 선출을 위한 회의를 주도하여 마티아가 사도직을 맡도록 지휘한 사람은 베드로였다(사도 1, 21-26 참조).
  2. 예루살렘 시민들과 유다인들에게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설교를 한 사람도 베드로였다(사도 2, 14-36 참조).
  3. 베드로는 이방인을 처음으로 성교회에 받아들였다(사도 11장 참조).
  4.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그의 처인 삽피라의 부정 사건을 처리하다(사도 5, 1-11 참조).
  5. 예루살렘 공의회 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방인의 할례 실리 여부에 대해 토론 후, 베드로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발언을 하자 온 회중이 조용해졌다(사도 15, 1-12 참조).
  6. 베드로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전 문턱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치다(사도 3, 1-10 참조).
  7. 바오로가 개종한 지 삼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갔었고, 베드로와 보름 동안을 함께 지내다(갈라 1, 18 참조).
  8. 천사가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셨음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하다(마르 16, 7 참조).
  9.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다(루가 24, 34).
  10. 베드로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대사제 가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열변을 토하다(사도 4, 2-22 참조).

  성서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열 두 사도의 명단 중 언제나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마태 10, 2; 마르 3, 16; 루가 6, 14; 사도 1, 15 참조). 마태로 복음사가는 베드로 사도가 첫째임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의 본 이름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직책을 부여하시며너 부르신 이름이 모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의 권위와 교도권에 대해 크게 논란된 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베드로가 재결(裁決)하자 회의가 종결된 것이다.
  베드로 사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언급이 더 이상 없다해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의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베드로가 으뜸임을 알기에 충분하다. 성서에는 베드로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확한 말씀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 19).

  주인으로부터 열쇠를 받은 자는 그 집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인물이 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권한을 위임하신 내용이 요한 복음서에 세 번씩이나 강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세 번 반복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시자, 그때마다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시며 세 번을 거듭해서 똑같은 명령을 내리셨다(요한 21, 15-17 참조). 이리하여 성교회의 모든 회원은 베드로의 동료 사도들도 포함하여, 베드로의 교도권과 수위권 아래 놓여졌다. 이 특권에 대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식사를 끝내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길로 떠나시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장담했었다.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루가 22, 33; 마태 26, 33; 요한 13, 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잘 알고 계셨다. 베드로의 장담에 대해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에게 악의 세력이 얼마만큼 강한지를 경고하셨다. 그분은 교회의 장래를 내다보시고 장차 오류와 악의 세력들이, 폭풍이 휘몰아치듯이 당신의 교회를 마구 내리칠 어두운 날들을 미리 내다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했던 과오를 뉘우침으로써 강한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교회가 어떠한 소용돌이에 빠지더라도 굳건히 대비할 수 있도록 베드로에게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 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루가 22, 31-32).

  나는 확신한다. 베드로가 앞장서서 인도하는 신앙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기도드려 그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은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교회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무류성의 근거이다. 만일 베드로가 신앙의 과오를 범한다면 어떻게 제 형제를 견고케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보장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오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신앙이 부패되면 죽음의 세력은 더한층 효과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진리가 오류와 함께 섞이게 된다면 결국에 가서는 신앙의 확실성이 뿌리채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과 지성은, 베드로의 이 특권은 영속적인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특권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직책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유효하므로 이 특권은 세상 마칠 때까지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계승되는 것이라야 한다.
  나 혼자만의 억지 주장이 아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 문헌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초기 5세기까지의 역사를 살펴 보자.
  1세기, 베드로가 순교하자 리노가 베드로의 뒤를 이엇으나 몇 년도 채 못되어 그 또한 순교의 길을 갔다. 클레토가 리노의 뒤를 이어 그 또한 순교했으며, 클레멘스가 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가 되어 로마의 주교가 되었다.
  로마에서 순교가 대물림하고 있던 그 당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하던 요한 복음사가는 아직 살아 있었고, 에페소 교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에페소 근처에 위치한 고린토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고린토인들은 요한에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인 로마의 클레멘스에게 판결을 요청하였고, 클레멘스는 권위로서 판결을 내려 문제를 해결지었다.
  요한은 갈릴래아에서 3년 동안이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생활했던 사도이고,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었을 만큼 그리스도의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던 때에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주님의 임종을 지켰던 사람이다. 그러면 고린토인들은 왜 요한에게 가서 문제 해결을 요청하지 않았던가? 이때 사도 요한은 그 문제를 가지고 자기에게 오지 말고 로마의 클레멘스에게 가라고 말했다.
  그러면 왜 요한은 클레멘스에게 가라고 말했을까? 클레멘스는 베드로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자기 자신의 권한과 임무의 한계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고, 당시의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와 같았다. 클레멘스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교들에게 명령하였고, 고린토 교회도 그 명령에 복종했다.
  2세기에 오리제네스는 베드로좌(座)의 권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을 치는 으뜸 권위는 베드로에게 수여되었고 그 위에 성교회가 세워졌다.”

  3세기의 치프리아노가 말했다.

  “로마의 성좌는 가톨릭 교회의 어머니이며 뿌리이다.”

  4세기의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썼다.

  “베드로가 있는 그곳에 성교회가 있다.”

  5세기에 개최된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황 레오 1세의 결정이 내려지자 모든 주교들은 그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베드로가 레오를 통하여 말한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와 똑같은 선언을 했다.

  “로마의 대답이 왔다. 이리하여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 후 세기를 거치면서 이 원칙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면 성교회가 분쟁에 휘말렸던 사건들이 너무나 빈번하였음이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성교회는 외부로부터 쉴새 없는 공격을 받아 왔다. 고대 로마인들의 유물론, 미개한 유목민들의 우상 숭배 등, 성교회는 주변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격은 세기를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17세기의 무신론, 18세기의 현실주의,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20세기를 특징 지어 주고 있다.
  양들이 틀릴 수 없는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때가 한 순간이라도 있었던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베드로의 힘이 필요로 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세상 마치는 순간까지도 교회는 언제나 베드로좌의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양떼를 영원하신 착한 목자의 품안에 인도하는 그날까지 베드로좌는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본연의 임무 수행을 계속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제적이고 거역할 수 없는 증거가 또 하나 있다. 만일 교황의 권한에 무류성이 없다면, 왜 세상은 교황의 무류성이 그릇된 것임을 증명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는 이미 1세기 전에 철저하게 검토되어 완결되었다. 성교회를 비방하고 반대하는 무리들이 교황의 무류권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조사 활동에 엄청난 비용을 허비하였다. 그들이 교회로부터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은 무류권에 의한 교회의 결정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근거를 단 한 가지만이라도 찾아내는 일이었다. 역대 교황들이 행사한 무류권에 의한 결정 사이에 서로 배치되는 점이 있거나 모순된 점이 있는지, 또는 전체 공의회의 결정과 상반된 사실이 있는가를 찾는 일이었다. 만일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만 하면 성교회는 영원히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리라.
  바티칸은 이들의 조사에 기꺼이 응하였다. 이들에게 관련 기록을 모두 공개하였다.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수많은 인사들이 모든 기록을 샅샅이 검토 대조하는 조사 활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면 그들의 조사 활동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기록에는 한 점의 의혹이나 흠도 없었다. 세기를 이어 하느님의 손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완전성으로 보호되어 왔다.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보존되고 준수될 것이다.
  아직 탄생되지 않은 장래의 세대들에게도 성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라’는 그분의 명령을 계속 준수해 나갈 것이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 19-20).

  그렇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확실성과 권위로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셨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

  그분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는 사목권을 부여하셨고(요한 21, 15-17)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라고 분부하셨을 뿐 아니라(루가 22, 32)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태 16, 19).
  모든 옛 교회 문헌이 한결같이 증명하고 있듯이,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다. 베드로의 후계자들의 수위권을 부인하는 것은 복음 성서를 부인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부인하는 짓이며, 자신의 지성과 이성은 물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성서의 내용 중에는 우리가 깨닫기 어려운 난해한 부분이 많고,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될 내용이 많이 있다. 따라서 성서를 자기 주관에 의존하여 함부로 해석하여 주장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혜를 모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교회는 이 소리 없는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보호하는 그리스도의 산 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성교회에 부여된 직무에 의거하여 성서가 오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때, 비로소 성서의 체계는 완성되고 성서 내용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권위에도 합당하게 된다.
  이래야만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내려 주신 계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 교회가 틀릴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있어야 그리스도의 진리를 조금도 의심없이 확실성을 가지고 믿을 수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음 한 가지 뿐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겸손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

– ‘내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월프레드 G.헐리 지음/정진석 대주교 옮김)
  : 제9장 ‘신앙과 도덕을 정의할 때 주어지는 교황의 무류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