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는 우리들 가운데, 우리를 위해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체 안에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몸과 피, 영혼과 신성으로 현존해 계신다. 성체와 함께 사는 우리는 실제적인 의미인 임마누엘(마태 1,23,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체와 함께하는 생활만큼 하느님을 가깝고 친밀하게 모실 수 있는 신앙은 이 세상에 없음을 숙고하도록 진정으로 열렬히 권유하였다.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여전히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6,56)라는 말씀처럼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우리 개개인과 하나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매일 우리에게 내어주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분이 원하신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위한 빵이 되셨고 그 빵은 매일 우리의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나날을 지탱시켜 주고 있다.
미사 성제의 신비
성체는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거룩한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데,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그는 제대상의 가장 근원적인 희생물인 예수님의 참된 무혈의 현존 양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오, 빵과 포도주가 십자가의 희생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되는 미사 성제는 얼마나 거룩한 기적인가! 그러므로 알퐁소 리구오리 성인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중 미사 성제보다 더 큰 일은 아무것도 없다.” 는 말이나 “거룩한 미사는 예수님처럼 무한한 것이 된다.” 라는 비오 신부의 말을 참으로 타당하다.
성인들 또한 미사 성제를 불같은 열정으로 사랑하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루에 미사를 두 번씩 참례하고 싶어했는데 병이 들었을 때는 한 동료 수사에게 그의 조그만 방에서 미사드려 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조차도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무한한 보화인 이 거룩한 신비에 대해 신자들이 이해도는 얼마나 부족한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서 있었다’ 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제대 가까이에 있을 때 성모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오 신부님은 어느날 “우리가 미사드리는 동안 성모님께서도 그곳에 함께 계셨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서 “당신은 성모님이 늘 제대 옆에 계시는 것을 못보셨습니까?” 하고 놀라운 어조로 반문하였다고 한다.
성체에 대한 갈망
예수님은 거룩한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 개개인에게 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몸과 피로 양육시키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고 계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요한 6,55). 이는 천상적 양육이고 사랑의 양육이며, 무한한 가치와 활력의 양육인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묵시 19,9).
이 빵을 먹지 않는 사람은 날마다 영적 빈곤과 손해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 6,53). 이 때문에 성인들은 예수님을 갈망하였고 이러한 “천상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요한 6,35)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어떠한 희생도 참아받음으로써 훌륭한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한 번도 궐하지 않고 성체를 영했던 복자 요셉 모스켓(Joseph Moscat)은 과학 박사들의 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먼 곳으로 여행할 때에는 밤 여행을 택하였으며 또 성체 대전에 나갈 수 있는 가톨릭 교회를 찾기 위해 낯선 도시를 배로 둘러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영성체를 하기 위해 언제나 전날 밤부터 단식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성체를 모시지 않으면 의료방문을 시작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아마 몇 발자욱만 걸어가면 성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일 미사 때 영성체를 하는 것조차 열정적인 사랑으로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엾은 우리들! 그러나 성모님께 의탁하면 성모님은 기꺼이 우리를 성체와 가깝게 되도록 은총과 활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성모님을 더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 성심께로 이끌어 올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해주신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미사 성제와 영성체는 우리를 예수님으로 충만되게 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해준다. 그래서 그날 온종일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성체께 향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15분마다 영적 성체배령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 대부분이 가능한 한 매시간 혹은 매순간마다 예수님께 달려가 그분 가까이 머물고자 하였던 것이다. 감실 앞에서 몇 분간 드리는 기도로 흠숭의 시간이 되는 성체조배는 그들에게 매우 열정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그들의 열성이란…!
성 로버트 벨라민은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 성당을 두 곳 거치는데 그때마다 들려 하루에 성체조배를 네 시간씩 하곤 하였다. 또 일곱 남매의 어머니였던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Taigi)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날마다 오랜 시간을 조배드리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그 시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성인도 하느님의 사랑의 창조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신 성체께 끌리는 그 마음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제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녀 젬마 갈가니는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신 성체의 선물에 대해 예수님께 감사드리게 될 것” 이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 중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으셨다. 그렇지만 사제없이 우리가 어떻게 성체를 모실 수 있겠는가? 사제들만이 오직 “하느님의 몸인 성체의 분배자” (1고린 4,1참조) 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때 최초로 세우신 미사 중에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루가 22,19)고 하셨다. 예수님의 희생을 재현하는 이 거룩한 사명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제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성별되어 “교회의 성직자” (히브 13,10참조)로서 자신을 봉헌하게 되는 것이다.
오, 복된 사제여! 사제는 예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천사들까지도 그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성 치쁘리아노는 “제대에서 사제는 예수님과 같은 인격으로 봉사를 하는 것” 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제가 되는 것은 사제 성소가 있어야 하며 선택된 성소에 상응한 은총과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 은총을 주시는 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그분은 바로 유일한 중재자이신 성모 마리아이시다. 그렇지만 그러한 은총을 받고자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모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성모님은 가장 으뜸 사제이신 예수님과 모든 사제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산제물의 편에서 예수님을 들어높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제들을 들어높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에페 4,13) 제단에 거동하도록 하신다.
이러한 사제들의 필요성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보다 더 열심히 성모님께 의탁하며 기도해야 한다. 이같은 큰 선행을 위하여 성모님과 함께 정진함에 있어 싫증을 내지 말고 꾸준히 인내해야 할 것이다.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마태9,38)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기도를 통해 성소가 이루어지고 증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은 사랑과 자비의 강력한 중재자이시므로 성모님께 기도함으로써 성소는 더욱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에 대해 열렬한 신심을 가졌던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로 2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약 천여 명의 성소자를 얻었었다.
“오! 사제들의 모후이시며 여왕이신 마리아여, 우리에게 거룩한 사제들을 많이 보내 주소서!”
– 마리아 마넬리 스테파노 신부
– 마리아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