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번 여러 사람에게 나타났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 나타남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평화와 생명과 의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착한뜻을 가진 사람들의 성화(聖化)와 내 나타남 하나하나가 어떻게 일치하는 지를 볼 수 있다.
가령 목자들에게 있어서는 은총이 내가 숨어서 산 30년 동안에 작용하였고, 그러다가 하느님의 아들을 따르기 위하여, 사탄에 의하여 흩어지고 길을 잃은 영원한 양떼의 양들을 모이라고 부르기 위하여 사랑의 소리를 외치면서 세상의 길 여기저기를 지나가는 하느님의 아들을 따르기 위하여 착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때가 되었을 때, 그 은총은 활짝 피어나 거룩한 이삭을 내밀었다. 나를 따라 다니던 군중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은 내 사자(使者)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소박하고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했기 때문이다. ‘저 분이십니다. 우리는 저분을 알아 봅니다. 저 분이 처음 아기 울음을 울 때 천사들의 자장가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착한 뜻은 선과 진리에 대한 갈망입니다. 저분을 따릅시다! 저분을 따르세요! 우리 모두가 주님이 언약하신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보낸 비천하고, 무식하고, 가난한 내 첫 번째 사자(使者)들은 이스라엘의 왕, 세상의 왕이 지나는 길 여기저기에 보초들 모양으로 늘어섰었다. 충실한 눈과 정직한 입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들, 그들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육신을 취하여 사람이 된 하느님인 내 둘레에 따의 공기에 고약한 냄새가 덜나게 하려고 그들의 덕행의 향기를 발산하는 향로와 같은 그들을, 피투성이의 골고타 길에 다른 몇 사람과 홀로 있기에 눈으로만 축복을 보낸 그들을 십자가 아래에서까지도 보았다. 그들은 몹시 흥분한 군중 가운데에서 나를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믿고, 아직도 바랐으며, 오래전 내가 태어나던 밤을 생각하고, 첫 번 잠을 불편한 나무 위에서 잤고, 마지막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나무 위에서 자는 죄없는 사람을 슬퍼하면서 내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마음이 곧은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거룩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또 동방의 세 현자, 성전에서의 시므온과안나, 요르단강에서의 안드레아와 요한, 그리고 다볼산에서의 베드로와 야보고와 요한, 과월절 아침의 막달라 마리아,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그전에 벌써 베다니아에서 그들을 일탈(逸脫)에 대한 용서를 받은 열한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깨끗한 요한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충실하였고, 영웅적이었고, 항상 사랑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매우 깨끗한 사랑과 그의 정신과 마음과 육체의 순결이 그에게 일체의 약함을 막아 주었다.
가믈리엘과 힐렐은 목자들과 같이 소박하지도 못하였고, 시므온과 같이 거룩하지도 못하였고, 동방 박사들과 같이 지혜롭지도 못하였다. 가믈리엘과 그의 스승이며 친척인 힐렐 안에는 바리사이파 정신이 칡덩굴처럼 발달하여 빛과 믿음의 나무의 자유로운 발달을 방해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사이파로서의 본질 안에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올바른 길에 있다고 믿었고, 올바른 길에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의인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본능적으로 갈망하였고, 지능으로도 갈망하였다. 그들의 정신이 ‘이빵에는 재가 너무 많이 섞였소. 참 진리의 빵을 주시오’ 하고 불만스럽게 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믈리엘은 그 바라사이파적인 칡덩굴을 부숴버릴 용기를 가질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그의 인간성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았었고, 그와 더불어 인간적인 존경, 개인적인 위험, 가족의 안락 따위의 고려에도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모든 일 때문에 가믈리엘은 ‘당신 백성 가운데로 지나가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줄을 몰랐고,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이익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 ‘그 지능과 그 자유를’ 쓸 줄을 몰랐었다. 다만 그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기다렸던 표, 그칠 줄을 모르는 가책으로 그를 쓰러뜨리고 몹시 괴롭혔던 표만이 그의 안에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마음을 생기게 하고 그의 이전 생각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아 봄으로써, 오류를 가르치던 스승이던 그가, 그의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벌어졌던 오랜 싸움 끝에 하느님의 진리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박사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단순하고 빛나는 진리를 수 많은 인간적인 규범으로 눌러버림으로써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왜곡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적인 규범들은 흔히 그릇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유리한 것잉었다.
그뿐 아니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행동하는 힘이 모자랐던 것은 가믈리엘뿐이 아니었다. 아리마태아의 요셉도 그러했고, 니고데모는 한층 더 그러했으니, 그들도 칡덩굴같이 복잡하게 얽힌 유다인들의 풍습을 박차고 새 교리를 받아들일 줄을 몰랐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리스도를 ‘몰래’ 만나러 오거나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만나 버릇하였고, 그것도 기껏 그들의 별장이나 베다니아의 라자로의 집에서 만나곤 하였다. 라자로의 집에서 만난 것은 그 집이 더 안전하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데오빌로의 아들에 대한 로마의 보호를 잘 알고 그 집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성 금요일에 그들의 동정을 태도로 나타낼 정도로 가믈리엘 보다는 확실히 선행이 앞섰었고 더 용감하였다.
가믈리엘 선생은 덜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그대들은 그의 올바른 의향의 힘이 어떠하였는지 주목하여라. 이 올바른 의향 덕택으로 그의 매우 인간적인 정의가 초자연적인 색체를 띠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사울의 정의는 악이 미친 듯이 날뜀으로 인하여 그와 그의 스승 가믈리엘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을 때 악마적인 것으로 더렵혀졌었다.
지혜의 나무(선악과 나무)는 각 사람의 앞에 서 있어서 그 나쁜 열매를 더 매력있고 더 구미를 돋우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잎들 사이에는 유혹하는 뱀이 밤꾀꼬리 목소리같이 아름다운 속이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사람의 영에 상처를 입히고 죽게 하는 수많은 좋지 못한 실과 중에서 좋은 실과를 분간할 줄 알고 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다. 그래서 좋은 실과를 따느라고 손이 찔리고 피곤하게 되더라도, 그 실과의 맛이 쓰고 모양이 보잘 것 없더라도 좋은 실과를 따야 한다. 그 실과가 더 매끈매끈해서 만지기에 기분좋고, 먹어서 달고, 보기에 아름답게 되는 그런 변화는, 올바른 정신과 이성을 가지고 좋은 실과를 고를 줄 알고, 쓰기는 하자만 거룩한 그 과즙으로 영양을 취했을 때에야 비로소 오는 것이다.
사울은 악과 증오와 불의와 죄악의 열매를 향하여 탐욕스러운 손을 내민다. 그리고 벼락을 맞아 쓰러지고 인간의 시력을 잃고 초자연적인 시력을 얻어, 의인이 되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미워하고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하던 그분의 사도와 증거자가 될 때까지 그 탐욕스러운 손을 악의 열매를 향하여 게속 내밀 것이다.
가믈리엘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초자연적이기도 한 빛과 정의의 오래된 씨앗이 싹이 터서 꽃이 피게 하려고 그의 인간성과 히브리 지상주의의 끈질긴 칡덩굴을 끊고 선의 열매를 향하여 손을 내민다. 그 씨앗은 아마도 더 분명하고 더 알아듣기 쉬운 말인 내 넷째 공현, 즉 네번째 나타남으로 그의 마음에 올바른 의향을 가진 그의 마음에 뿌려진 것이었는데, 그는 그 씨앗이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자 하는 고귀한 갈망과 성실한 애정으로 이 씨앗을 보존하고 보호하였었다. 그가 마음 속에 여러 십년 동안 간직하였던 이 씨앗의 딱딱한 껍질을 그의 의지와 내 피가 깨뜨렸다. 바위와 같은 그 마음은 성전의 휘장과 예루살렘의 땅이 갈라짐과 동시에 갈라졌고, 나를 향하여 최후의 소원을 소리높이 외쳤다. 그 부르짖음을 십자가 아래 누워 있던 내 육체의 귀로는 듣지 못하였으나 내 하느님의 영으로는 잘 들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가장 훌륭한 제자들의 말이라는 뜨거운 햇볕을 받고,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피의 비를 맞아, 이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의 그리스도교의 새 나무는 성 금요일의 비극이 이전의 모든 나무와 풀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없애 버렸던 그 자리애 돋아난 것이다.
그의 새로운 그리스도교와 새로운 성덕의 나무는 내 눈앞에서 돋아나서 우뚝 솟았다. 비록 나를 더 일찍 이해하지 못한 잘못은 있지만, 내 사형선고와 스테파노의 사형선고에 관여하고자 하지 않은 그의 올바름 때문에, 내 신자가 되고 진리와 빛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그의 소원이 내게 용서를 받았고, 아버지와 성령의 강복도 받아서 소원이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사울의 경우와 같이 강력하고 난폭하게 벼락을 맞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정의와 사랑과 빛과 진리와 하늘나라의 영원히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데려 올 수가 없었던 오만한 사울의 경우에는 다마스크스로 가는 길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