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성모 마리아가 내게 말씀하신다.

  “네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너는 내가 한층 더 심하게 우는 것을 볼 것이다. 지금 당장은 네게 요셉의 성덕을 보여 네 정신을 높이 올려 주겠다. 요셉은 사람이었다. 즉 그의 정신을 위하여 그의 성덕을 제외하고는 다른 은혜를 받은 것은 없었다. 나는 티없는 여자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모든 은혜를 누리고 있었다. 내가 티없는 여자인 줄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영혼에는 활동의 자원, 내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자원이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티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셉은 그의 안에 대단히 둔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둔한 인간성을 가지고 끊임없는 노력에 의하여, 완덕에 도달하려는,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들려는 의지를 가지기 위하여 그의 모든 능력을 씀으로써 완덕을 향하여 올라가야 했다.
  아아! 거룩한 내 남편! 어떤 일에도, 생활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에서까지도 거룩하였다. 그의 천사와 같은 순결로 거룩하였고, 그의 인간적인 성실로 거룩하였으며, 그의 참을성으로, 일에 대한 그의 열의로, 그의 언제나 한결 같은 침착성으로, 그의 겸손으로, 모든 것으로 거룩하였다. 그의 거룩함은 이 사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한 사제가 그에게 ‘당신이 여기 와서 자리잡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말하니, 그는 얼마나 더 큰 피로를 향해 가는지를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나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마리아의 마음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것만 아니면. 나를 위해서는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이 예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예수, 마리아가 그의 천사와 같은 사랑의 대상이다. 내 거룩한 남편은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고, 이 사랑에 자기를 종과 같이 완전히 바쳤다.
  요셉을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근로자들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의 수호성인을 삼았다. 그러나 요셉은 임종하는 사람들과 부부와 근로자들의 수호성인일 뿐 아니라, 봉헌된 영혼들의 보호자로도 정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봉헌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요셉이 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참아받으며, 모든 것을 재빠르고 명랑하게, 끊임없이 좋은 기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자기를 봉헌한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네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아니, 두 가지가 있다. 즈가리야는 사제이고, 요셉은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사제가 아닌 요셉이 그의 정신을 얼마나 사제보다도 더 하늘로 향하고 있는지 보아라. 즈가리야는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성서를 인간적으로 해석하는데,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양식에 너무 끌려간다. 그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러나 비록 덜 중대하지만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른다. 요한의 탄생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늙었고 제 아내가 석녀인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서 자라야합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도 남아 있는 그 교오의 뿌리로 자기가 예수에게 유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과 같이 예수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선생 노릇을 해서 유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착한 의향 때문에 즈가리야를 용서하셨다. 그러나 ‘스승’에게 선생들이 필요했겠느냐?
  나는 그에게 예언에서 빛을 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나보다 더 유익하다고 믿고 있어서 그의 해석을 자기 방식에 적응시켰다. 나는 고집해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고 이것이 너더러 하라고 하는 둘째 고찰이다-그러나 나는 사제를 그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그의 품위 때문에 존경하였다.
  사제는 일반적으로 항상 하느님께 비춤을 받는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했다. 참 사제이면 비춤을 받는다. 복장이 사제에게 그의 신성한 성격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참 사제인지를 판단하려면 그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내 예수가 말한 것과 같이 거룩하게 하거나 타락시키는 것들이 영혼에서 나온다. 어떤 개인의 행동 방식을 전적으로 나타내는 것들이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참 사제인 때에는 일반적으로 항상 하느님께 영감을 받는다. 참 사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위하여 초자연적인 사랑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내 아들이 이미 너를 이 구속하는 일에 봉사하게 했으니, 나는 중언부언 하지 않겠다. 참 사제의 수효가 늘어나기 위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여라. 네 경우에는 너를 인도하는 이의 말을 믿고, 그의 조언을 믿고 따라라.

  순종은 언제나 구함을 받는다. 우리가 받는 조언이 모든 점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너는 이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순종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다행스러웠다.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아기들을 몰살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탄이 그를 부추겨서 이 밀물과 같은 이 살인 범죄를 확대시키고, 유다인들의 장래 임금을 없애기 위하여 팔레스티나의 모든 권력자들을 부추겨 같은 살인범죄를 짓게 할 수 없었겠느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처음 전도시대에, 즉 기적으로 인해서 대중들의 주의가 환기시켜지고 권력자들의 시선이 그분에게로 끌렸을 때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어떻게 그 먼 나자렛을 떠나 온 팔레스티나를 건너질러, 박해받는 히브리인들을 환대하는 에집트에 갔겠으며, 갓난 아기를 데리고 박해가 휘몰아치는 동안에 어떻게 여행을 했겠느냐? 똑같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에서 도망하는 것이 더 쉬웠다. 순종은 항상 구해 준다. 이것을 기억하여라, 그리고 사제에 대한 공경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다운 공명정대의 표이다.
  그들의 사도적 정열을 잃은 사제들은 불행하다! – 이 말은 예수도 하였다. 사제들을 업신여기는 권한이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사람도 불행하다!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을 축성하고 나누어 주는 것은 사제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격이 신성하지 못하더라도 이 접촉이 그들을 신성한 성작과 같이 거룩하게 한다. 거기 대하여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 책임을 진다. 너희들로서는 오직 그들의 품위만을 보고, 그 나머지는 상관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주 예수보다 더 비타협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라. 예수는 그들의 명령으로 하늘을 떠나서 내려와 그들의 손으로 들려진다. 예수에게서 배워라. 그리고 사제들이 눈이 멀고 귀가 먹었으면, 그들의 영혼이 마비되고 그들의 생각이 병들었으면, 그들이 그들의 사명과 대립하는 죄의 나병에 걸렸으면, 그들이 무덤 속에 있는 라자로들이면, 그들에게 건강과 생명을 다시 주시라고 예수를 불러라.
  희생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의 기도와 고통으로 예수를 불러라. 영혼 하나를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천국에 가도록 예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의 영혼 하나를 구하는 것은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제는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데려오는 그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제를 구하는 것, 즉 사제를 거룩하게 하는 것, 사제를 다시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를 가지고 신비적인 그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 그물에 걸리는 고기 하나하나가 너희들의 영원한 영광에 새로운 빛을 보태준다.
평안히 가거라.”